[한경데스크] 제조업 모세혈관 '오백채'의 한숨

입력 2013-10-06 18:41   수정 2013-10-06 21:32

공장은 낡았어도 기술은 첨단…'소공인 집적지' 마련 시급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서울 문래역에서 도림천쪽으로 200여m쯤 가면 어깨를 맞댄 작은 공장들을 만난다. ‘오백채’로 불리는 곳이다. 일제시대인 1940년께 지어진 낡은 집을 개조해 들어선 월세공장들이다. 66~132㎡(20~40평) 남짓한 수백 개의 공장에서 선반이나 밀링 프레스 2~3대를 놓고 쇠를 깎는다.

이 부근에서 25년째 공장을 돌리는 엄봉남 삼진정공 사장은 “일제시대 때 영등포에 대규모 방적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임직원 주거용으로 작은 집 500여채가 건설됐다”며 “그래서 지금도 이 동네는 ‘오백채’로 불린다”고 말했다.

이들 가운데는 자동차 기계 금속 방위산업제품 등의 3·4차 협력업체들이 많다. 종업원 10명 미만의 전형적인 ‘소공인’들이지만 사장들은 대부분 30~40년 경력을 가진 장인들이어서 기술력이 뛰어나다. 이곳에서 초정밀 압연용 롤을 만드는 이재헌 네오정밀 사장은 “우리가 만드는 롤로 압연한 동선은 굵기가 머리카락의 3분의 1에 불과하고, 소니 부품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고 말했다.

그런 오백채 지역 기업인들이 요즘 불안에 휩싸여 있다. 지난해 이 지역 재개발이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조건부로 가결된 데 이어, 최근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고시돼 공장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이곳 소공인들의 우려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공사기간 중 가 있을 곳이 없다는 점과 재개발 뒤 들어서게 될 공장에 중후장대장비인 선반 밀링 프레스 등을 들여놓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곳의 한 기업인은 “지주들의 의견을 들어 지어질 산업시설은 아파트형 공장이 될 가능성이 큰 데, 이 경우 입주할 수 없는 업체가 대부분”이라며 “이 지역 소공인의 30~40%는 사업을 접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오백채’는 소공인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작년 말 펴낸 ‘2012년 중소기업현황’에 따르면 전국의 소공인은 26만3194개로 전체 제조업체(32만5082개)의 80.9%에 이른다. 국내 제조업체 5개중 4개는 소공인인 셈이다.

이들은 전국에 퍼져 있다. 서울에만 해도 신도림동(금속 가공) 종로(귀금속) 창신동·면목동(봉제) 등지에서 각각 수백 개의 소공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광명·시흥과 부산 인근도 비슷하다.

작은 제조업체들은 산업의 모세혈관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하기도 한다. ‘풀리지 않는 나사’로 세계시장을 석권한 일본 히가시오사카의 하드록은 종업원 3명으로 시작한 회사이고, 지금도 종업원이 50명 이하다. 쾰른대성당 등 세계 주요 성당과 공연장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한 독일 클라이스는 종업원이 60여명에 불과하다. 지금 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땀흘려 신제품을 개발 중인 청년기업인들도 대부분 소공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하지만 소공인 중 상당수는 월세공장을 구하지 못해 밤잠을 설친다. 각종 규제나 낮은 수익성 때문에 작은 공장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작은 공장은 ‘시장의 실패’가 일어나는 전형적인 분야다. 정부가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정부가 대도시 인근에 집적지를 건설해 저렴하게 임대하는 방법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뿌리나 모세혈관이 죽으면 생명체는 살아갈 수 없다. 장인들의 대가 끊기면 간단한 금속가공조차 중국이나 베트남에 가서 해와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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