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함께 커 온 Fed…'물가안정·고용극대화' 법으로 명시

입력 2013-12-22 21:44  

글로벌 이슈 - Fed 100년의 역사

1907년 최악 금융위기, 중앙은행 필요성 대두…1913년 Fed법 통과
금리조절·양적완화 통해 세계금융 절대지존 역할



[ 뉴욕=유창재 기자 ]
1907년 11월2일. ‘월스트리트의 황제’로 군림하던 존 피어폰트 모간(JP모간)의 개인 서재에 40~50명의 은행가가 모였다. 모간은 워싱턴에 있던 재무부 장관도 자신의 서재로 불러들였다. 1907년 미국은 최악의 금융공황에 빠져있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시작된 달러 부족 사태가 일련의 기업 파산으로 이어지자 예금자들은 현금을 찾기 위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쳤고 은행 간 자금거래는 완전히 중단됐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모간밖에 없었다. 그는 각 은행과 투자신탁회사들의 상황을 파악한 뒤 상대적으로 건전한 은행이 취약한 은행에 대출을 해주도록 ‘지시’했다. 거래중단 위기에 처한 증시에도 긴급 자금을 지원했다. 금융시장은 곧 안정을 되찾았지만 미국은 이후 몇 년 동안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어야 했다.

○금융공황이 낳은 Fed 시스템

미국 최대 은행 JP모간체이스의 창업자인 모간의 막대한 영향력을 새삼 확인시켜 준 이 사건은 동시에 중앙은행이 왜 필요한지를 부각한 사건이기도 했다. 2008년 비슷한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벤 버냉키 미 중앙은행(Fed) 의장이 100년 전 모간이 했던 역할을 대신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에서 중앙은행의 필요성은 17세기부터 제기됐다. 하지만 정부가 발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민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 헌법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 논리에 번번이 밀렸다.

지방의 영세한 은행들이 화폐를 발행하다 보니 갑자기 현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곧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으로 이어졌다. 1873, 1884, 1890, 1893년에도 뱅크런이 일어났고 결국 1907년에는 금융패닉으로 이어졌다. 이에 워싱턴 의회에서 ‘최종대부자’ 역할을 통해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킬 중앙은행 설립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논의를 주도한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미국은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경쟁력이 높은데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신용 붕괴’ 때문에 경제개발 및 성장이 지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간이 영원히 금융위기를 막아줄 수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단일 중앙은행이 모든 것을 통제하기엔 너무 큰 나라였다. 중앙의 몸집이 너무 커지는 것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감도 있었다. 이에 올드리치 의원 등 정치인들은 중앙에서 금리와 통화량 등을 결정하되 집행은 12개 지역 중앙은행이 맡는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시스템을 고안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13년 12월23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상·하원을 통과한 ‘연방준비은행법’에 서명하면서 Fed가 탄생했다.

○Fed, 위기 때마다 역할

금융시장 안정을 목표로 시작된 탓에 설립 초기 Fed의 역할은 돈을 찍어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다 1930년대 대공황과 1970년대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Fed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성이 늘어났다. 특히 오일쇼크로 물가와 실업률이 함께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미 의회는 1977년 연방준비은행법을 개정했다. 고용극대화와 물가안정을 목표로 적정 수준의 장기 금리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법으로 명시했다.

이때부터 Fed는 고용극대화와 물가안정이라는 ‘이중책무(dual mandate)’를 갖게 됐다. 주요국 중앙은행 중 법적으로 이중책무를 가지고 있는 곳은 Fed가 유일하다. 한국은행을 포함한 대부분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법에는 이중책무가 명시됐지만 1980년대 이후 Fed도 사실상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왔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폴 볼커 전 Fed 의장의 고금리 정책이 대표적이다. 다시 고용에 집중하기 시작한 건 2008년 금융위기로 실업률이 치솟은 후다. Fed는 2008년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발표문에 처음으로 ‘고용극대화’를 정책 목표로 명시하고 기준금리를 제로(0~0.25%) 수준으로 인하했다.

같은 날 회의에서 모기지담보부채권(MBS)을 매입해 시중에 돈을 푸는 이른바 1차 양적완화 정책을 발표했다. 화폐 공급량을 늘려 경제의 ‘총수요’를 증가시키고 이를 통해 경제성장률을 높인다는 케인스학파의 통화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이후 2차, 3차 양적완화를 거치면서 Fed는 세계의 실물경제와 자산가격, 금융시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관으로 자리를 굳혔다.

○독립성 투명성 확대로 시장 신뢰

위기 때마다 몸집을 불려 온 Fed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공화당 의원들은 Fed가 통화정책에 대한 과도한 재량권을 갖는 것에 거부감을 보여왔다. 밀튼 프리드먼 시카고대 교수의 계보를 잇는 통화주의 학파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는다. 통화량 증대는 결국 인플레이션만 야기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Fed가 그나마 시장의 신뢰를 받고 있는 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키고 투명성을 확대해 왔기 때문이다. Fed는 재무부가 발행한 국채를 시장에서 사들여 돈을 풀지만, 재무부로부터 직접 채권을 사지는 않는다. 재무부 등 정부가 Fed의 경기판단에 관여하는 일도 없다.

20세기 후반까지 ‘비밀의 사원’으로 불릴 만큼 비밀주의를 지켜온 Fed는 1999년에 들어서야 금리정책을 공개했다. 하지만 버냉키 의장 취임 이후에는 시장과의 소통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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