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의 격랑에 휩싸여 있는 한국 해운 위기의 본질은 투자의 위기다. 지난 10년간 해운경기 침체와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로 투자를 머뭇거리는 사이에 머스크(덴마크)-MSC(스위스)-CMA CGM(프랑스) 등 세계 3대 선사와의 격차는 까마득하게 벌어졌다. 세계 1위 머스크가 운영하고 있는 583척의 선박은 한진해운(116척)과 현대상선(58척)을 합친 것의 3배가 훌쩍 넘는다. 초대형 선박을 앞세운 규모의 경제, 전 세계 운항노선을 거미줄처럼 엮는 네트워킹의 효율은 이미 족탈불급이다.
이근영 위원장의 오판
이 같은 상황에서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지난해 말 각각 3조원대의 자구계획안을 발표하며 또 한 번의 투자 빙하기로 빠져들고 있다. 재무구조를 개선하라는 금융위원회와 산업은행의 고강도 압박에 선박과 항만 터미널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당 1000달러짜리 컨테이너 박스까지 매물로 올려놓았다. 이런 식으로 핵심 자산들을 다 팔고나면 장차 뭘로 영업을 하고 돈을 벌겠다는 건지…. 많은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올해 글로벌 해운경기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그 과실을 향유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 들어 해양강국을 기치로 내걸고 부활한 해양수산부는 속수무책이다. 지난해 대선공약이었던 선박금융공사 설립은 무산됐고 2조원 규모의 해운보증기금 설립도 감감무소식이다
물론 해운업계가 공멸의 위기에 내몰린 것은 원천적으로 리스크 관리에 실패한 기업들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하지만 금융 논리가 지나치게 득세하는 것은 금물이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해운산업의 경쟁력 약화가 수출로 먹고사는 경제 전반에 어떤 파장을 몰고올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돌이켜보면 금융 논리가 항상 옳았던 것도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3년 1월3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하이닉스반도체는 매각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독자생존 가능성은 안중에도 없는듯한 확신이었다. 이 위원장은 하이닉스가 그해 3분기부터 7분기 연속 흑자를 내면서 기념비적 회생을 이룰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국내 해운업계가 이 같은 극적 반전을 이룰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위기 이후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을 것이냐다. STX와 대한해운이 떠난 항로에는 이미 유럽계와 중국계 선사들이 부산항과 광양항 물동량을 속속 받아먹고 있다. 이 같은 국적선사들의 퇴조는 장담컨대, 한국 수출경쟁력에 직격탄을 날릴 것이다.
해운의 위기는 수출의 위기
윤진숙 해수부 장관은 금융당국에 더 이상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푸념으로 일관해서는 안된다. ‘시장의 신뢰회복이 우선’이라는 태도는 정책당국으로서 무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해운의 위기를 공론화하고 대책을 수립하고 설파해야 한다. 우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덴마크 프랑스 중국 독일 등이 자국 선사들에 어떤 지원책을 펼쳤는지를 조사해 국무회의에 올려야 할 것이다. 그들이라고 세계무역기구(WTO)로부터 자유로운 처지는 아니었을 터. 무력감에 대한 토로가 잦아지면 결국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이 세간의 인심이다. 나중에 혹여 섭섭해하는 일이 없으면 한다.
조일훈 경제부장 ji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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