功은 돌리고 비난 떠안고…'죽어야 사는' 차관들

입력 2014-01-09 22:00   수정 2014-01-10 04:12

인사이드 Story - 정부 부처 '2인자들의 숙명'

"장관만이 빛나야 한다" 자신 낮추며 乙의 행보
국회 '물밑설득' 위해 뛰고, 고충 해결 등 집안살림까지



[ 류시훈 / 이심기 / 조미현 / 강현우 기자 ]
지난달 20일 금융위원회 간부들과 출입 기자들의 송년회 저녁 자리. 신제윤 금융위원장에 이어 정찬우 부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북한에서 장성택이 처형된 뒤부터 2인자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진 것 같습니다. 처신하기 더 힘들어졌어요.”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잠시 후 신 위원장이 말을 받았다. “그렇죠. 그런데 저는 요즘 일할 맛 납니다.”

두 사람의 발언은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농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각 부처의 수장인 장관과 2인자인 차관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장관 후보지만 ‘자신을 죽여야’

차관은 정부 부처의 ‘2인자’다. 수십년 공직생활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극소수만이 오르는 자리다. 언제라도 장관 후보군에 포함될 수 있다.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화려하지 않다. 자신을 끝없이 낮추며 인내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장관만 빛나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잃어서는 안된다.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장·차관의 관계를 군대의 지휘관과 참모에 비유했다. 지휘관(장관)이 ‘지 마음대로 휘두르는’ 자리라면, 참모(차관)는 ‘참고 모질어야 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슈퍼 차관’으로 불리는 이석준 기획재정부 2차관이 대표적이다. 그는 정부 예산편성과 세제개편까지 총괄하고 있지만 자신을 ‘을(乙)’이라고 말한다. 국회 업무는 물론 다른 부처와의 업무협의에서도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말단 사무관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한진현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도 대표적 ‘을 차관’으로 불린다.

○국회 책임지고 내부 다독이고

국회 권한이 막강해지면서 대(對)국회 업무도 ‘2인자’들의 능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법안이 제때 처리되도록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국회의원들을 설득해야 부처가 추진하는 정책이 제대로 집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옛 한나라당 수석전문위원을 지내 국회 마당발로 통하는 김재홍 산업부 1차관이 그런 사람이다.

집안 살림을 살피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추경호 기재부 1차관은 세종시로 이주한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마련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렇다면 차관들이 가장 괴롭고 난처할 때는 언제일까. “우리 부의 정책이나 장관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좋지 않아 개각 얘기가 나올 때”라고 상당수 차관들은 말한다.

이럴 때 2인자들은 ‘방패’가 돼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차관은 “장관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데도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좋지 않은 평가를 해서 참으로 난감했다”며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말싸움을 벌인 적도 있다”고 전했다.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될 때도 차관들은 난처하다. 정 부위원장은 한동안 ‘금융권의 실세’로 불렸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공약 마련에 관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정현옥 고용노동부 차관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장하나 민주당 의원이 “장관 대신 답변하라”고 요구해 순간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 정부에서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일할 때 박영준 당시 2차관에게 “철저하게 낮은 자세로 일하라”고 당부했다. ‘왕차관’이 아닌 다른 차관들에게도 이 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진리로 통한다.

류시훈/이심기/조미현/강현우 기자 bad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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