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라 기자 ]
유럽이 ‘러시아 딜레마’에 빠졌다. 크림자치공화국 합병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 정치권을 중심으로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가 강화되고 있지만 러시아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온 독일, 영국, 프랑스 기업들은 실리를 찾는 모습이다. 러시아와 EU의 무역 규모는 미국(380억달러)의 11배가 넘는 4610억달러에 달한다.
○러·EU무역 규모 미국의 11배
파이낸셜타임스(FT)는 27일(현지시간) 프랑스 에너지기업 토탈이 러시아 룩오일과 셰일에너지 개발을 위한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했다고 소식통을 인용, 보도했다. 룩오일은 러시아 최대 민영에너지 기업이다. FT는 “토탈과 룩오일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부터 협력을 추진해왔지만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서둘러 계약을 완료했다”며 “글로벌 기업들이 자국의 정치·외교적 명분과 무관하게 러시아와의 협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토탈은 이미 러시아 2위 국영 에너지기업 노바텍 지분 16%를 보유하고 있다.
EU 국가 중 가장 초조해하는 건 독일이다. 독일은 EU 국가 중 네덜란드에 이어 러시아의 2위 무역국이다. 한 해 교역 규모는 749억달러(약 80조755억원). 현재 폭스바겐, 아디다스 등 6200개 독일 기업이 러시아에 진출해 있으며 러시아 누적 투자액도 작년 말 기준 220억달러(약 23조6620억원)에 달한다. 도이체방크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독일 국내총생산(GDP)은 0.5%포인트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일 지멘스의 조 캐셔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6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직접 만나 장기 투자계획을 논의했다. 지멘스는 1853년 러시아의 전보설비 구축 사업을 맡은 뒤 161년간 러시아에서 사업을 펼쳐왔다. 지금도 주요 고속철도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독일 화학회사 바스프와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즈프롬은 둘의 협력 관계에 이상이 없음을 재확인했다. 가즈프롬은 2012년 독일 최대 가스 저장 및 에너지 유통을 담당하는 바스프 자회사 윙가스에 50% 이상 지분을 투자했다. 최근 독일 정치권에서 러시아 자본이 독일 에너지 시장에 침투한 것을 우려하자 가즈프롬 측은 “서방의 경제 제재가 유럽 가스 공급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며 “독일은 여전히 러시아의 주요 투자국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영국, 부동산 시장 타격 우려
영국도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에 불안해하긴 마찬가지다. 러시아 신흥 재벌은 런던 고급 부동산시장의 ‘큰손’이다. 지난해 러시아 부호들이 런던 부동산에 투자한 돈은 1인당 750만달러(약 80억원)다.
영국 학교에 다니는 러시아 학생도 지난해 25% 급증했다. 가즈프롬을 비롯해 53개 러시아 기업이 런던 증시에 상장돼 있으며 이들의 시장 가치는 5000억달러(약 57조6500억원)다. 올해 15개 러시아 기업이 총 10억파운드를 조달해 런던 증시에 상장할 계획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 금융시장이 출렁이면서 이미 타격을 입은 기업도 있다. 러시아에 제빵 기계 등을 공급하는 울프강 아이저 디오스나 이사는 “루블화 가치가 올 들어 12% 폭락하면서 같은 기계가 1년 전에 비해 25%가량 비싸졌다”며 “루블화 추가 하락을 우려해 계획했던 프로젝트를 여러 건 보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대형마트 체인 ‘메트로’는 최근 러시아 증시 상장을 무기한 보류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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