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고'로 나라 곳간 지키자] 국회 예산정책처장 "못하겠다" 한마디에 물 건너간 페이고法

입력 2014-04-06 21:00  

(1) 낮잠 자는 '페이고' 법안

野 "의원 발목 잡는 법 만들라니 매우 불순하고 웃기는 일"
예산정책처는 '나몰라라'…1년 6개월째 논의조차 안돼
4월 국회서도 처리 안되면 6월 선거후 지방재정 파탄 우려



[ 이태훈 기자 ] “규제영향평가까지는 너무 부담스럽다. 위원님들께서 심사하실 때 그 점을 감안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국경복 국회 예산정책처장)

지난 2월19일 국회 운영위원회 제도개선소위 회의장. 소위 위원장인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같은 당 이한구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회법 개정안 심사에 들어가려 하자 국 처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한마디로 ‘바쁜데 그것까지 할 엄두를 못 내겠다’는 얘기였다. 개정안은 국회의원이 규제를 만드는 법안을 발의할 때 규제사전검토서를 첨부토록 한다는 내용으로, 예산 소요 법안뿐 아니라 모든 규제 법안에 대해 검증을 하자는 점에서 ‘페이고(pay-go)’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예정처장 한마디에…

하지만 예산정책처장의 한마디에 법안 심사가 시작도 하기 전에 김이 빠져버렸다. 국회의원 혼자서 규제사전검토서를 만드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 예산정책처의 뒷받침이 없으면 이 제도는 시행되기 힘들다.

운영위 소위에서는 국회법 개정안 논의가 끝나면 이만우·이노근 새누리당 의원 등이 대표발의한 페이고 관련 법안 논의로 자연스레 넘어갈 예정이었다. 이 법안들은 정부는 물론 국회에서 새로운 재원이 필요한 입법이 발의되면, 재원확보 계획 방안도 제출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재원확보 계획을 짜려면 해당 입법에 따라 소요되는 재원을 추계하고, 필요한 재원만큼 분야별 조달 계획을 검토해야 한다. 이 역시 예정처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예정처가 ‘나 몰라라’하는 바람에 이날 페이고 법안들은 아예 논의조차 못했다. 국회 스스로 국가 재정을 감시하겠다며 2012년 말부터 페이고 법안을 발의해 놓고 이렇게 1년6개월 동안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다.

“이런 법 만드는 것, 웃기는 일”

이날 운영위 소위 속기록을 들여다보면 페이고를 포함한 규제개혁법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야당 의원들 사이에 원색적인 표현까지 등장했다.

정성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수석부대표는 “의원의 입법권을 제한하려는 이런 시도는 매우 불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회가 이런 법을 만드는 것은 웃기는 예”라며 “그나마도 제왕적 대통령 국가에서 대통령이 다 권한을 갖고 있는데…”라고 했다. 같은 당 홍익표 의원은 “규제영향평가 검토서를 첨부한다는 것은 국회 입법권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월5일 국무조정실 등의 업무보고 때 김기현 당시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에게 “페이고 법안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라고 물을 만큼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의원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줄이기 싫다는 이유로 묵살했다. 예산정책처는 업무 증가를 이유로 이에 동조했다.

야당 “법안 통과 가능성 0.1%”

지금 분위기로는 4월 국회에서도 페이고 등 의원 입법을 제한하는 법안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운영위 야당 간사인 정 원내수석부대표는 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정부는 국회가 규제를 양산하는 것처럼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다”며 “앞으로 페이고 법안 통과 가능성은 0.1%도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4월 국회에서도 페이고 법안이 처리가 안 되면 당장 ‘6·4 지방선거’ 이후 각 지방자치단체 재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예산 대비 채무비율에서 인천 대구 부산 등 도시는 대부분 위험 수준인 35~40%를 넘거나 육박하고 있다.

조세재정연구원 한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선거 후 포퓰리즘 공약을 밀어붙일 경우 지자체 재정 부실이 악화되고 결국 이는 중앙정부의 재정 악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 페이고(Pay-go)

‘pay as you go(번 만큼 쓴다)’를 줄인 말. 정부나 국회가 의무지출 예산을 늘리는 사업을 추진할 때 이에 상응하는 재원조달 방안을 동시에 마련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으로 재정건전성을 높이기 위한 재정준칙의 하나다. 세입을 늘리든지, 아니면 다른 사업 항목의 예산을 깎는 등의 방법이 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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