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예진 정치부 기자) “뻥은 쳤지만 거짓말은 안했다.” “밥은 먹었지만 식사는 안했다.”
5년 전인 2009년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헌재(헌법재판소)’ 놀이입니다. 당시 야당 의원 91명은 여당인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적법절차에 따르지 않고 ‘날치기 처리’했다고 헌재에 제소했는데, 헌재는 절차상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미디어법이 유효하다고 판결내렸습니다. 이 판결 이후 미디어법에 반대하는 이들은 헌재 판결을 조롱하는 의미로 ‘헌재 놀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헌재 놀이는 정치인, 고위 공직자, 연예인 등 유명 인사들의 궁색한 변명을 조롱할 때도 종종 쓰입니다.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돈은 받았지만 뇌물을 아니다”, “주소이전은 했지만 위장전입은 아니다”, “정치 개입은 했지만 공직선거법 위반은 아니다” 등이 대표적인 헌재 놀이의 적용 사례입니다.
이 게임 원리를 일본이 간파한 것일까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헌재놀이를 역으로 이용하고 나섰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대신 공물을 봉납하는 꼼수를 부린 것입니다.
아베 총리는 21일 마사카키라는 공물을 바쳤습니다. 그것도 ‘내각 총리대신 아베 신조’라는 이름 넉자를 또렷하게 새겨서요.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국제적 물의를 일으킨지 몇달이나 됐다고 또 다시 도발을 감행한 겁니다. 이번에는 제사상은 차렸지만 절은 하지 않았으니 공식적인 참배가 아니라는 논리를 펼칠 모양입니다.
작년 말 대놓고 신사참배를 감행한 아베 총리답지 않게 ‘헌재 놀이’로 피해가다니 소심해진 것 같다고요? 그건 아닙니다. 오는 23일 일본을 국빈 방문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분석입니다. 아베 총리는 20일 일본 요미우리TV에 출연해 “국가를 위해 싸우다 쓰러진 병사를 위해 손을 모으고 비는 것는 지도자의 당연한 생각”이라며 신사참배의 정당성을 주장해 우리 정부의 공분을 샀습니다.
일본의 초점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에 맞춰져 있습니다.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고 압박하는 오바마 대통령이 신사참배에 대해 당연히 한 소리를 할 테고 미·일 정상회담 분위기도 좋지 않을 테니 말이죠. 신사 참배는 가야겠고, 파장은 최소화하려는 아베가 꾀를 냈다고 보여집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정례회견에서 아베 총리의 공물 봉납에 대해 “(공인이 아닌) 사인(私人)의 입장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견해를 밝힐 일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런데 ‘헌재 놀이’가 미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은 아베 총리의 공물 봉납을 두고 “오바마 대통령의 도쿄 방문을 이틀 앞두고 한국과 중국을 화나게 하는 행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총리 명의로 공물을 보냈으니 ‘대리 참배’라는 비난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일본은 이렇게 항변할지 모릅니다. 공물은 매년 총리가 보내왔던 것이라고.
실제로 아베 총리는 작년 봄, 가을 제사 때도 공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원칙 없이 이랬다 저랬다 ‘헌재놀이’를 일삼는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그래도 우직하게 우경화하는 ‘일관성(?)’ 하나는 높이 평가해야 할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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