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사람 미리 다 정해놓고 민간인 '들러리' 세우기도
공직 경험한 민간인 "기업에선 실력 없으면 퇴출
관료는 기수별 때되면 승진"
[ 주용석/조진형/심성미 기자 ]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 공직사회가 ‘관피아(관료+마피아)’란 소리까지 듣게 된 이유는 뭘까. 많은 전문가는 관료사회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고시 순혈주의’를 근본 원인의 하나로 지목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민간은 기민하게 조직운영체제를 바꿔가며 대내외 환경변화에 적응해가고 있는데 관료집단만은 변화를 거부한 채 오로지 고시 합격 순서에 따라 승진을 결정하고 조직을 관리해온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시 기수로 서열화
정부가 최근 수년간 공직 사회 쇄신을 위해 도입한 공무원 임용제도가 아직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도 고시기수로 철저하게 서열화돼 있는 관료사회의 폐쇄성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난해 모 경제부처가 1급 한 자리를 개방형 공모직으로 내놨을 때 일이다. 서류 전형이 시작되기도 전에 관가에선 “A씨가 내정됐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행시 출신인 그는 해당 부처에서 국장까지 지낸 고참 관료였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다른 지원자들은 들러리로 전락했다.
노무현 정부의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일했던 민간 전문가는 “인사철에 공무원들이 대놓고 장난 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자기들끼리 사람을 미리 정해놓고도 버젓이 공개채용 공고를 냈다”고 꼬집었다. 그러다 보니 산하기관 인사든, 개방형 직위든 공모제 자체가 허울뿐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개방형 직위로 충원된 중앙 부처 고위공무원(국장급 이상)은 모두 139명. 이 가운데 민간인은 22.3%(31명)에 그쳤다. 그나마 이들의 상당수는 원래 관료 출신으로 잠깐 외부로 나갔다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안행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개방형 직위는 임기가 2~3년에 불과하고 월급도 민간보다 적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유능한 외부 인사를 영입하기 어렵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공무원들끼리 모여서 하는 얘기는 좀 다르다. “공직을 노리는 민간인 중 상당수는 함량 미달”이란 소리가 거리낌없이 나온다.
민간 창의적 인재들의 좌절
하지만 공직을 경험해본 민간 전문가들의 시각은 완전히 딴판이다. 지금은 한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K씨는 “사실 처음에 스마트하게 보였던 사무관도 5년쯤 지나면 기수서열에 찌들어가는 모습이 나타난다”며 “이들과 대기업의 비슷한 연령대 과장급의 능력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면 철저하게 경쟁으로 단련된 민간기업 엘리트가 고시 출신 공무원들보다 오히려 훨씬 우수하게 성장한다고 K씨는 덧붙였다.
정부도 이런 지적을 의식해 개방형 직위제에 이어 2011년부터 5급 민간경력 채용제도를 도입했다. 특정 분야 경력이 10년 이상이거나 박사 학위 소지자 등을 5급 사무관으로 바로 뽑아 민간 충원을 늘리려는 제도다. 지난해 이렇게 채용된 5급은 96명. 고시(행정고시, 기술고시) 출신 353명의 27%로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하지만 이 제도 역시 한계가 있다. 중앙부처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B서기관은 “민간 경력 10년이면 보통 35~36세 정도”라며 “20대 후반에 고시에 합격한 관료들에 비해 승진 경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장급 정도에 이르면 정년이 임박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시 출신에 뒤처지도록 만들어져 있는 이 제도에 창의적인 민간인재가 지원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한국 공직사회는 고시 기수를 기준으로 상관이 지시하는 과제를 무난히 수행하는 ‘과제 수행형’ 관료만 양산했을 뿐 현장 상황을 장악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이고 실행력 있는 관료는 키워내지 못했다. 이렇게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는 구조로는 향후 정부의 리더십 회복은 물론 대한민국 개조도 어렵다는 것이 많은 민간 전문가의 우려다.
주용석/조진형/심성미 기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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