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표준 만들어 놓고 준수 강요하는 순간 '규제'
자기분야 표준 만드는데 기업 참여 안하는 건 경쟁사에 펜 쥐어주는 격
[ 김재후 기자 ] “인증제도는 규제당국이 정한 표준과 시장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표준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 구분이 모호할 때 인증이 규제가 되고, 부적절하고 불법적인 인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롭 스틸 국제표준화기구(ISO) 사무총장은 1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가진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한국에서 인증제도 논란이 일고 있는 배경을 잘 알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1947년 설립된 ISO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표준화기구로 꼽힌다. 현재 164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으며, 1만9573종의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표준을 정하고 있다.
스틸 사무총장은 인증제도 자체가 규제로 작용할 가능성에 대해 “규제당국이 일괄적으로 준수해야 할 표준을 만들어놓고 이걸 강하게 요구하는 순간 법령과 같은 힘을 갖게 된다”며 “이런 것은 성장과 혁신을 위해 시장에서 자발적으로 도입하는 인증이나 표준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시장의 활력을 저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인증사업을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질문에 “일률적으로 대답하긴 곤란하지만 안전 의료 보건 등을 제외한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인증이나 표준화는 정부나 공공기관보다는 시장참가자인 민간분야가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과 제도가 빠르게 변하는 경제를 쫓아오지 못하는 만큼 시장에서 개발한 자발적 표준을 적극 활용하고 장려해야 한다”며 “특히 한국처럼 신흥경제국에서 선도국으로 변해가고 있는 나라는 정부가 너무 많은 규제를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스틸 사무총장은 이어 “국제 경제질서에서 인증이나 표준화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며 한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인증과 표준화 작업에 한국 기업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한국을 배려하지 않을 것”이라며 “경쟁업체에 펜을 주고 자기 사업에 대한 규칙을 대신 써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가 인증과 표준에 대한 가치를 적극 알리는 동시에 기업과 협회 상공회의소 등은 이 부문의 가치를 공유하고 확대해나가는 활동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스틸 사무총장은 이와 함께 한국의 통상당국도 각종 무역협정 협상과정에서 한국의 인증과 표준조항을 넣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증과 표준화 기준이 무역협정에 채택될 경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현재 진행 중인 한·중 자유무역협정(FTA)도 중요하지만 여러 나라가 함께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이 그래서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 롭 스틸 사무총장은
1954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났다. 회계사다. 한국 국가기술표준원과 비슷한 뉴질랜드표준화기관(SNZ)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 2009년부터 ISO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내년 9월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ISO 총회 등을 국가기술표준원과 협의하기 위해 지난 14일 방한했다.
글=김재후/사진=정동헌 기자 h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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