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 스님은 불교의 지성화·대중화·생활화를 내걸고 조선시대 500년의 탄압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 민간신앙에 파묻힌 불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힘썼다. 부처의 근본 가르침을 회복하고 계율을 정비하는 한편 수백년 동안 승려 출입이 금지됐던 서울 사대문 안에 ‘대각교당’이란 도심사찰을 세웠다.
3·1운동으로 1년 반 옥살이를 할 때는 감옥에서 개신교 목사들이 한글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불경의 한글 번역에 앞장섰다. 1928년 ‘조선글 화엄경’을 펴내자 당시 언론이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화제였다고 한다. 절에 풍금을 들여놓고 찬불가를 만들어 어린이들과 함께 불렀던 일도 유명하다.
용성 스님의 손상좌(제자의 제자)인 법륜 스님은 22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용성 스님은 만주 북간도에 대각교당과 선농당을 건설해 방황하는 동포들의 정착을 돕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했으며, 여기에서 나오는 자금 대부분은 독립운동에 썼다”고 설명했다.
법륜 스님은 “용성 스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중생을 제도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정신을 조화롭게 실천한 분”이라며 “역대 조계종 종정의 60% 정도가 용성 스님의 문중일 정도로 그 가르침은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법륜 스님은 또 “용성 스님은 승려라는 직분에 충실하면서도 늘 대중에게 다가갔고 사회의식과 시대의 염원에 깨어 있었다”며 “저도 자연스럽게 그런 면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법륜 스님이 ‘즉문즉설’로 대표되는 대중적 불교 활동과 시대적 과제인 평화와 통일 운동에 힘을 쏟는 것은 용성 스님의 영향이라는 얘기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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