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경제의 만남] (31) 법률서비스의 보완재 패러리걸(paralegal)

입력 2014-06-09 16:49  


2008년 광우병 파동으로 한 차례 소란을 겪었던 한국의 FTA는 2011년 다시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문제가 되는 점은 비준 동의안의 번역 오류였다. 당시 체결한 FTA 중 한·미 FTA 협정문에서만 290여건에 달하는 번역 오류가 발생했고, 한·EU FTA 협정문에서도 160개의 번역 오류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중에 한글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오타의 문제도 일부 존재했지만, 무엇보다 논란이 된 것은 영어와 한국어 간의 미묘한 차이를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해당 문제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비준 동의안이 국회의 동의를 거치면 바로 법률적 효력을 갖기 때문에 각각의 조항이 곧 법률조항과 같기 때문이다. 또 FTA의 경우 ‘역진방지조항(ratchet)’으로 인해 한번 시행되고 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원문에서 의도하는 내용을 전후맥락을 살펴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할 경우 영구적으로 국익에 엄청난 손해를 미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거의 마무리되는 줄로만 생각했던 FTA 논란이 번역 문제로 인해 다시 커지게 된 것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국가 간의 계약 문제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세계화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개인들 혹은 기업 단위에서도 해외 경제주체들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비슷한 문제들이 종종 발생한다. 실제 민간부문의 경우 선진국보다는 아세안 국가와 같은 개발도상국가를 파트너로 크고 작은 계약을 맺는데 계약조항을 해석함에 있어 해당국의 실정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해 손해를 입는 경우가 자주 목격된다. 최근에는 외국계 로펌이나 국내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계약조항의 해석을 주로 담당하는 인력을 채용해 대응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패러리걸(Paralegal)’이라 불리는 준법조인들이다.

법률업무 보조하는 준법조인

패러리걸이란 변호사 자격은 없지만 법률사무를 보조하기 위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법률 보조원’, ‘변호사 보조원’ 정도로 해석된다. 우리나라의 법률에서는 패러리걸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가 이뤄져 있지 않지만, 이미 미국을 비롯한 영국, 캐나다 등에서는 법률 시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정받는 직업이다. 2006년 이들의 평균연봉은 약 6만달러였는데 당시 최고 연봉을 받는 엔지니어 평균연봉이 8만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패러리걸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패러리걸의 업무는 주로 번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이들이 하는 번역은 일반적인 번역과는 다르다. 다루는 대상이 법률 문서로 다양한 법률 단어들로 이뤄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단어라 하더라도 전후 문맥에 따라서 어감의 강도가 달라지는데 수백억 원의 돈이 걸린 계약에서 그 미묘한 차이를 제대로 옮겨내지 못할 경우 잘못된 계약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문 계약서의 작성을 담당하기도 하는데, 이를 위해 해당국의 법률을 검토하고, 대규모 자금의 이동이 이뤄지는 계약일 경우 금융당국의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일을 수행하기도 한다. 번역 업무라고는 하지만 패러리걸이 수행하는 번역은 일반적인 통·번역과는 그 범위가 다르다.

바늘과 실 vs 버터와 마가린

법률 현장에서 패러리걸의 중요성이 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업무의 형식은 번역이지만 정확한 일의 수행을 위해 다양한 관계자들과 접촉하고, 관련 문건을 찾는 등 법률적 조언을 담당해야 하는 국내 변호사들의 역량이 미처 닿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해줌으로써 보다 정확한 법률 서비스가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해외의 판례와 법률적 사례가 갖는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패러리걸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는 추세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보완재’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보완재(complementary goods)란 함께 사용하는 경우 효용이 증가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의미한다. 커피와 설탕, 자동차와 휘발유, 바늘과 실 등이 보완재의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보완재와 대비되는 개념은 대체재이다. 어느 한 재화나 서비스의 소비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을 다른 재화나 서비스의 소비로 대체할 수 있는 경우 경제학에서는 이를 대체재(substitutional goods)라고 한다. 버터와 마가린,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경제학 교과서에서 흔히 사용하는 대체재의 예이다.

한편, 이러한 대체재와 보완재는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다. 두 재화 혹은 서비스의 관계가 대체재였다가 보완재로, 때로는 그 반대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Dropbox’나 MS의 ‘Skydrive’와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는 좋은 예이다. 이들 서비스는 인터넷만 연결돼 있다면 개인 자료를 하드디스크에 저장할 필요 없이 외부 서버에 업로드해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하드디스크가 없어도 자료를 저장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 클라우드 서비스가 등장할 당시에는 하드디스크와 함께 사용해 만족감을 높일 수 있는 보완재로서의 성격을 지녔지만, 이제는 그 기능이 확대되면서 하드디스크를 대체할 수 있는 서비스로 탈바꿈하게 됐다.

계속되는 업무영역 확대

하지만 변호사와 패러리걸의 보완관계는 당분간 계속해서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도 패러리걸의 업무 영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에 초점을 맞추고 시작된 이들의 업무 영역은 점차 법무나 송무 분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법무사가 처리하는 업무의 일정 부분을 이들이 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법인의 설립과 청산, 각종 등록 및 변경, 정정 업무 등이 그것이다. 한편 일부 패러리걸의 경우 우리나라 법률이 정한 테두리 내에서 형사사건의 현장 조사를 담당하기도 한다. 변호 업무의 보조자로서의 형식적·질적 범위가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신입 패러리걸의 학력 수준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며, 법률 전공자 외에도 다양한 전공의 인재들이 패러리걸에 도전하고 있다.

패러리걸의 직업으로서의 전망은 매우 밝다. 선진국의 법률시장을 살펴보면 이러한 전망은 보다 설득력을 갖는다. 미국의 경우 전문적인 법률 조언이나 법정에서 진행되는 소송은 자격증을 갖춘 변호사들이 직접 수행하지만 나머지의 업무들은 패러리걸과 나누어 수행하고 있다. 변호사들의 경우 높은 시간당 임금으로 인해 이들이 자잘한 조사부터 소송과정까지 모두 담당하면 전체 법률 서비스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초조사나 기본적인 법률상담의 경우 패러리걸들이 주로 처리하고 있다. 미국과 인접한 캐나다의 경우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면허를 부여해 이들을 아예 법률가로 취급하기도 한다.

법률시장의 특징이 달라 우리나라에서 미국이나 캐나다의 패러리걸과 동일한 수준으로 역할이 커질 수는 없겠지만, 급속도로 진행되는 세계화나 FTA를 통한 경제통합의 추세 속에서 패러리걸의 역할이 보다 커지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문성을 갖춘 패러리걸이 많아질수록 변호사와 패러리걸의 보완관계는 계속해서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 대체재와 보완재

대체재란 어느 한 재화나 서비스의 소비로부터 얻는 만족을 다른 재화나 서비스의 소비를 통해 대체할 수 있는 속성을 의미한다. 버터와 마가린이 대표적인 대체재의 예이다. 반면 보완재란 함께 소비할 때 더 높은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의미한다. 커피와 설탕, 자동차와 휘발유가 서로 보완재라 할 수 있다. 대체재와 보완재는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재화나 서비스 간의 관계가 보완재에서 대체재로, 대체재에서 보완재로 바뀔 수 있다.

김동영 < KDI 전문연구원 kimdy@kdi.r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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