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진 정치부 기자) 현역 정치인중 관운(官運)만 놓고보면 황우여 부총리(사회부총리겸 교육부장관)의 적수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난 5월 국회의장 경선에서 패배했을 때만 해도 그의 운(運)이 다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시험이나 선거에서 단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던 그에게 당시 패배는 단순히 ‘첫번째’가 아니라 내리막길의 ‘신호탄'이 될 것이 자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뚜기’처럼 부활했습니다. 1969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96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 5선을 거치는 동안 당 사무총장 원내대표 당대표 등 핵심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사회부총리겸 교육부장관 직함은 그의 화려했던 정치이력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세월호참사’란 국가적 재앙, 안대희 문창극 등 2명 국무총리 후보자의 중도낙마, 김명수 사회부총리의 논문표절 등 자격시비로 인한 퇴진 등 3대 악재가 줄줄이 겹치지 않았다면 황 부총리가 발탁될 수 있었을까요.
이처럼 억세게 운좋은 황 부총리가 지난 6년간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콤비’ 인연을 맺어온 게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원내대표-정책위의장' 출마를 시작으로 ‘당대표-원내대표'에 이어 박근혜 정부의 쌍투마차 격인 ‘경제부총리-사회부총리(신설)’까지 벌써 세 번째 ‘콤비플레이'입니다.
둘은 2009년 5월 처음 러닝메이트를 이뤄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경선에 출마했습니다. 두 사람은 안상수-김성조 의원, 정의화-이정구 의원과 함께 치열한 3파전을 벌였습니다.
4선의 황우여 의원과 재선의 최경환 의원은 “4·29 재보선 참패의 원인으로 꼽히는 당내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 계파 갈등을 치유할 적임자가 자신들”이라며 ‘당의 온전한 화합’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친이계의 높은 벽을 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친이계 ‘안상수 원내대표-김성조 정책위의장’ 조가 2차 결선에서 ‘황우여-최경환’ 조를 95표 대 62표로 눌렀습니다.
두번째 만남 때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힘으로 19대 총선에서 승리하며 친이계가 몰락하고 친박계가 득세했기 때문이죠. 2012년 5월 15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황 부총리가 임기 2년의 대표로 선출됐습니다.
그로부터 딱 1년 뒤인 2013년 5월 15일엔 최 부총리가 원내대표로 뽑히면서 두 사람은 여당 지도부의 ‘원투 펀치’로 활약했습니다. 두 부총리의 당시 당 리더십은 양호했다는 게 정치권 내 평가입니다. 박 대통령의 확고한 신임을 바탕으로 최 부총리가 당청 관계를 사실상 총괄했고, 당 대표이자 중립으로 분류되는 황 부총리와 협의 채널을 구축해 서로 협의하고 수용함으로써 공조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로 다른 스타일로 인해 갈등이 없지만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강경파로 꼽히는 최 부총리가 정권 초반 야당 공세에 강하게 맞선 반면 ‘어당팔(어수룩하지만 당수는 8단)’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황 부총리는 야당과의 조화를 내세우는 기조를 내세워 미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비롯해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 조세법 개정 등 박근혜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어온 입법안들입니다. 황 부총리는 시간을 갖고 논의하자는 입장이었지만 최 부총리는 속도감 있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맞서며 의견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5월 두 사람 모두 임기를 마칠 즈음에는 황 부총리가 원내대표 시절인 18대 국회에 처리한 ‘국회 선진화법’을 놓고도 최 부총리가 공공연하게 날을 세우는 장면이 자주 노출됐습니다.
당 관계자는 “황 부총리가 조화와 타협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스타일이라면 최 부총리는 강한 추진력을 가진 스타일이기 때문에 원만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균형감 있게 당이 운영됐었다”며 “새누리당의 ‘투 톱’이 자리를 옮긴 내각에서도 이런 두 사람의 비판적 협조관계를 바탕으로 호흡을 잘 맞출 것”이라고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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