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서 기자 ] “임원 경쟁을 하게 되면 얘랑 붙겠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일을 잘했는데, 외환위기로 퇴사한 이후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다가 얼마 전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 회사 텔레마케터로 일하고 있더군요.”
한 시중은행 K부행장은 20여년 전 자신과 함께 입사한 여자 동기생의 얘기를 들려주며 씁쓸해했다. 그는 “은행장이 나올 정도로 금융권에서 여성들의 입지가 커지고 있지만 아직도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인재들이 도태되는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개선됐다고 하지만 여성에 대한 시각에서 만큼은 금융권의 보수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K부행장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금융계에서 여성 인력의 홀대를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한 분석기관이 39개 금융회사가 최근 제출한 반기보고서를 뒤져본 결과 최근 1년 동안 금융회사 직원 수는 3% 감소했다. 경기침체 탓이지만 문제는 여성들의 퇴사 비율이 남성들보다 2배나 높다는 점이다. 남자는 8만7182명에서 6월 말 기준 8만5394명으로 1788명(2.1%)이 퇴사했지만, 여자는 8만759명에서 7만7514명으로 3245명(4.0%)이 사라진 것이다.
삼성카드의 경우 여직원이 1665명에서 1031명으로 38.1% 감소했고 삼성증권도 1331명에서 876명으로 34.1% 줄었다. 여성 직원이 감소한 금융사는 25곳으로, 남성 직원이 줄어든 곳보다 네 곳이 많았다. “‘유리천장’이 사라졌다고 하는 건 남자들이 하는 소리일 뿐”이라는 여성 금융인들의 볼멘소리가 나올 만하다.
물론 회사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 직원들이 남성 직원보다 훨씬 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하기에 무리가 없다. 한 여성 금융인은 “회사가 어려워지면 남자와 여자 가운데 누가 나가야 하는지 머릿속에 떠올려본다면 여성 금융인들의 현실을 바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 금융인들의 모임에 가보면 연사로 초빙된 정치권과 금융권 고위 인사들이 항상 듣기 좋은 말로 여성 임원이 많이 나오도록 아낌없이 성원하겠다는 인사말을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여성 인력 육성대책 문제를 물으면 궁색한 답을 내놓을 때가 많다. 금융회사들의 각성과 대책이 필요하다.
박종서 금융부 기자 cosmos@hankyung.com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