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도 그런 포근한 존재 돼야
이순우 < 우리금융지주 회장 wooriceo@woorifg.com >
요즘 들어 항상 늦은 시간에만 퇴근한 것 같아 수요일 가정의 날을 맞아 큰맘 먹고 일찍 퇴근을 했다. 오랜만에 밖에서 먹는 음식이 아닌 아내가 차려주는 저녁 밥상이 어찌나 꿀맛이던지,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볼록해진 배를 소화도 시킬 겸 남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사는 집이 남산 근처라 예전에는 틈만 나면 남산으로 산책을 다니고는 했는데, 은행장이 되면서부터는 그런 여유가 줄어들어 많이 아쉬웠다. 편한 복장으로 집을 나섰는데 밤공기는 옷깃을 여며야 될 정도로 생각보다 쌀쌀했다. 아직 덥고 불편한 여름인 줄 알았건만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흘러가는 계절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바쁘게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오랜만에 갖는 잠시의 여유가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느긋하게 걸으며 조금이라도 더 여유를 갖고 싶었는데 간만의 산책이라 그런지 금세 숨이 차올랐다. ‘이쯤이면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생각을 할 때쯤, 저만치에 의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산책을 하다 숨이 차오르고 발바닥이 아파올 때쯤이면 찾을 수 있던 의자다.
의자는 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이제는 닳아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다. 다리의 이음매도 오랜 시간에 헐거워졌는지 앉을 때면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그래도 평생동안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는 데 익숙해서인지 그 의자에 앉아 있으면 그렇게 아늑하고 편안할 수가 없다.
그 의자에 앉아 은행을 생각했다. 은행은 기본적으로 고객의 돈을 예치하고 이 돈을 다른 고객에게 분배하는 예대마진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영리기업이다. 하지만 다른 기업들과는 다르게 은행에는 ‘공공성’이라는 책임 역시 주어졌다. 단순한 재화의 분배가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의 근간인 서민과 소상공인, 중소기업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고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대시키는 것이야말로 은행 본연의 역할이다. 지치고 힘들 때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늘 그 자리에 있는 의자처럼, 은행 역시 고객들이 언제 어느 때라도 기대어 숨을 고르고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 힘을 얻을 수 있게 늘 그 자리에 있어줘야 한다.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언제고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겨줄 오래된 의자가 있어 든든했다. 은행 역시 고객에게 편안하고 든든한 의자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이순우 < 우리금융지주 회장 wooriceo@woorif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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