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가 윌리엄 패터슨, 金 부족한 상태에서 은행권 발행하는 조건…파산상태 英 채권 구매
正貨로만 상환했던 은행권…잉글랜드 은행권으로 상환되며 중앙은행으로 자리잡아
제대로 된 역사연구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나열을 넘어서야 한다. 경제이론과 정합되면서 동시에 주요 인물들의 행동의 배후에 있는 동기와 이론이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로스버드의 ‘은행업의 미스터리’는 뛰어난 역사연구서이다. 그의 저술에 기대어 현대적 중앙은행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이 중앙은행으로 기원하게 된 과정을 살펴본다.
현대적 중앙은행의 효시로 볼 수 있는 잉글랜드은행은 17세기 말 거의 파산상태였던 영국 정부와 특권을 추구했던 금융가 사이의 거래에 의해 만들어졌다.
1693년 영국 하원에서는 전비 조달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됐다. 세금을 올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대안이었고 정부가 채권을 발행한다고 하더라도 민간의 저축이 별로 없는 상태여서 채권의 판매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스코틀랜드 출신 은행가인 윌리엄 패터슨은 자신의 은행이 정부 채권을 구매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단 정부가 자신의 은행이 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하는 조건을 달았다.
패터슨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1694년 7월 27일 잉글랜드은행이 정부의 인허를 얻어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현대적 중앙은행제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은행에 많은 특권이 주어졌기에 영국 왕 윌리엄은 새로운 화폐제조 기능을 하는 잉글랜드은행의 주주가 됐다.
패터슨은 영국 정부에 잉글랜드은행권을 법정 화폐로 삼을 것을 요구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은행에 새로운 은행권으로 정부 채권을 살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모든 정부 자금을 잉글랜드은행에 예치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잉글랜드은행은 즉각 76만파운드의 은행권을 발행했고 대부분은 정부 채권을 사는 데 쓰였다. 이는 상당한 인플레이션 효과를 가져왔다. 특권을 부여받은 잉글랜드은행과 경쟁하던 은행들은 잉글랜드은행권을 정화(正貨)로 교환하려고 했으며, 이로 인해 설립 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96년 5월 잉글랜드은행은 파산상태에 직면하게 됐다.
이 시점에서 중앙은행제도에 많은 문제점이 내재되도록 만든 결정이 이뤄졌다.
당시 영국 정부는 잉글랜드은행으로 하여금 지급 정지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즉, 잉글랜드은행은 자신의 은행권을 금으로 상환하는 계약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게 하는 동시에 계속 영업하면서 자신이 받을 채권은 지급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은행권은 정화 대비 20% 할인돼 거래됐는데, 언제 은행이 지급 요구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1696년 말 잉글랜드은행은 76만5000파운드의 은행권을 발행했지만, 3만6000파운드만 정화로 지급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당시에는 이 정도로 지급 준비가 되지 않은 은행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1698년 정화 지급이 재개됐지만 잉글랜드은행의 초기 역사는 잉글랜드은행에 다양한 특권이 추가됨에도 불구하고 정화 지급 중지와 재개로 얼룩져 있다.
1696년 새로운 경쟁은행(naional land bank)이 등장했다가 실패했지만, 잉글랜드은행은 의회를 움직여 영국에서 경쟁 상대의 등장을 원천봉쇄하는 입법을 하도록 만든다. 1708년에는 잉글랜드은행 이외에 6인 이상의 파트너를 둔 은행을 금지하고, 여타 은행들은 은행권을 발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6개월 이하의 대출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써 잉글랜드은행은 실질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관이 됐다.
1711년에 설립된 남해회사가 잉글랜드은행의 라이벌로 급부상했고 또 남해회사의 파산과정에서 잉글랜드은행도 지급 정지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남해회사의 거품이 끝나면서 잉글랜드은행은 영국은행업에서 독보적 존재가 됐다.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은행의 은행권은 여타 ‘지방’ 은행들이 지급준비금으로 두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은행권을 발행하는 상태가 됐다. 1793년 영국에는 400여개의 부분지급준비 은행들이 있었다.
프랑스와의 긴 전쟁 동안에 인플레이션을 통해 전비를 조달하게 되면서 1793년에는 영국은행 중 3분의 1이 지급 정지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797년 잉글랜드은행도 지급 정지했으며 이는 1821년까지 24년간 계속됐다. 이 기간에 비록 잉글랜드은행의 은행권은 법정 화폐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법정 지급 수단이 됐다. 이는 인플레이션 시대의 도래를 의미했다. 1797년 총은행권 잔액은 1100만파운드였던 것이 2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816년에는 두 배가 넘는 2400만파운드가 됐다.
1826년 은행업이 자유화돼 모든 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됐지만, 런던의 65마일 밖으로 한정됐으며 새로운 은행들은 채무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도록 했다. 그래서 잉글랜드은행의 독점은 유지됐다. 1833년에도 은행업의 자유화 조치가 있었지만, 잉글랜드은행의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제 런던 안에서도 은행권이 아니라 예금을 받는 은행들이 설립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제 잉글랜드은행권은 법정 지급 수단으로 영구적인 특권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과거 자신의 은행권을 정화로만 상환할 수 있었던 여타 은행들이 이제는 잉글랜드은행권으로도 자신의 은행권을 상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지방은행들이 지급준비금을 거의 잉글랜드은행에 예치하고 잉글랜드은행에 필요할 때 정화나 잉글랜드은행권의 지급을 요청하는 관계로 변하게 되면서 잉글랜드은행은 명실상부하게 중앙은행으로 기능하게 됐다.(잉글랜드 은행의 성장과정을 살펴볼까요?)
“이제 은행권들은 비록 왕의 돈은 아닐지라도 왕의 돈에 근접하고 있다”는 언급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영국의 중앙은행제도는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정부 채권을 정화 준비 없이 인수할 수 있는 은행권을 발행할 특권을 갖게 해서 국민들에게 인플레이션 조세를 물리기 위해 등장했다. 이는 시장에서 자생적으로 등장한 제도가 아니라 법률로 특정 은행에 진입장벽을 만들어 가능하게 된 제도였다.
김이석 < 시장경제제도 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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