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꽉 막힌 R&D 자금 순환
연구보단 영업이 더 중요…사업화보단 논문 먼저 챙겨
부처 중·장기 과제 45%…기획위원이 직접 수주도
[ 김보영 / 김태훈 / 심성미 기자 ]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올해 연구하는 과제는 600여건이다. 2008년 대비 예산은 소폭 늘어났지만 담당 과제 수는 300여개에서 두 배로 뛰었다. 과제당 예산 규모는 줄어든 반면 연구원들의 일은 늘어난 구조다.
정부 연구개발(R&D) 사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린 핵심 문제 중 하나가 연구과제중심제도(PBS·project based system)다. 연구 책임자가 정부와 민간에서 과제를 수주해 운영비와 인건비 등을 자체 조달하는 방식이다. 정부 R&D 예산은 18조원에 달하지만 각 부처들이 유기적 연계 없이 사업을 발주하다 보니 과제 수는 늘어난 반면 국책과제에 대한 집중 투자 기회는 줄고 있다.
심판 선수 구분되지 않는 경쟁
1996년 첫 도입된 PBS의 핵심은 경쟁이다. 각 부처들이 R&D 과제를 내놓으면 연구기관들은 경쟁을 통해 이를 수주해야 한다. 사업을 따지 못하면 연구비도 받을 수 없게 했다. 도입 초기 PBS 제도는 연구계에 긴장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사업 기획과 평가 때 논문, 특허 등 양적 지표들이 강조되면서 연구시스템을 왜곡시켰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출연연구소 연구원 A씨는 정부 R&D 과제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년 기획에 참여한 사업 중 일부를 자신이 직접 수주했다. 기획자가 연구를 따내는 일명 ‘셀프 과제’로 의심되는 사례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최근 산업기술평가관리원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5년간 1271건의 중장기 R&D 과제 중 기획위원이 직접 과제를 맡은 사례가 568건에 달했다. 조사 대상 중 44.7%다. 기획자가 소속된 기관이 과제를 따낸 건수도 224건, 17.6%를 차지했다.
연구보다 영업 잘해야 인정
연구자들이 본업인 연구보다 사업 수주에 더 많은 힘을 쏟게 된 것도 부작용 중 하나다. ETRI, 한국전기연구원 등 응용기술 개발이 많은 출연연은 정부가 과제와 상관없이 주는 예산인 출연금 비중이 각각 14.6%와 26.6%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밖에서 벌어야 직원들 월급을 줄 수 있다.
이런 여건에서 도전적인 연구에 나서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사업화 성과보다 논문, 특허 등을 먼저 챙겨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구를 잘하는 사람보다 정부 부처를 드나들며 과제를 많이 따오는 사람이 대접받는 게 PBS의 또 다른 모순이다. R&D 예산을 관리하는 기관의 한 관계자는 “출연연의 예산구조를 보면 외부에서 수주한 사업 예산을 모아 누더기 옷을 만든 형국”이라며 “연구 기관 고유의 특성에 맞는 새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출연연 자체 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제당 평균 예산 2억6000만원 불과
작년 정부 R&D 예산 17조1784억원 가운데 국방, 인문·사회를 제외한 과학기술 분야 예산은 12조원대다. 이를 지원받아 수행한 과제는 4만5000여건에 달한다. 예산이 늘었지만 과제 수도 늘어나 과제당 평균 예산이 2억6500만원에 불과하다.
응용기술을 개발하는 산업통상자원부가 과제당 6억6500만원, 기초 분야의 미래창조과학부가 과제당 4억3200만원으로 비교적 많을 뿐 보건복지부, 교육부, 중소기업청 등은 모두 1억원대다. 세계 시장에서 통할 사업화 성과를 내기에는 턱없이 적은 액수다.
PBS 도입 후 출연연의 중장기 연구가 줄어드는 대신 단기성과 위주의 프로젝트가 늘어난 게 원인이다. 단기 과제를 수주하다 보니 인건비 절감 방법으로 비정규직 인력 고용이 자리 잡았다. 올해 출연연 비정규직은 전체 1만864명 가운데 4586명으로 30%에 달한다.
금동화 한국공학한림원 부회장(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은 “PBS 도입 후 정부가 R&D 기획을 주도하면서 예산 확대 측면에서 추진력이 생기고 단기 과제에서 경쟁을 유발한 것은 장점”이라면서도 “중장기 국가 과제를 맡아야 하는 출연연에까지 PBS를 적용한 것은 부작용이 더 많았다”고 평가했다.
■ PBS
project based system. 연구개발(R&D)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997년 당시 과학기술처가 도입한 제도. R&D 과제를 배정할 때 연구기관 간 경쟁을 시켜 이를 따낸 기관에 연구에 필요한 인건비·간접비 등을 주는 방식이다. 성과와 관계없이 인원에 따라 예산을 주던 방식에서 벗어나 연구 수주와 예산을 연계시킨 게 특징이다.
김보영/김태훈/심성미 기자 w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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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보단 영업이 더 중요…사업화보단 논문 먼저 챙겨
부처 중·장기 과제 45%…기획위원이 직접 수주도
[ 김보영 / 김태훈 / 심성미 기자 ]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올해 연구하는 과제는 600여건이다. 2008년 대비 예산은 소폭 늘어났지만 담당 과제 수는 300여개에서 두 배로 뛰었다. 과제당 예산 규모는 줄어든 반면 연구원들의 일은 늘어난 구조다.
정부 연구개발(R&D) 사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린 핵심 문제 중 하나가 연구과제중심제도(PBS·project based system)다. 연구 책임자가 정부와 민간에서 과제를 수주해 운영비와 인건비 등을 자체 조달하는 방식이다. 정부 R&D 예산은 18조원에 달하지만 각 부처들이 유기적 연계 없이 사업을 발주하다 보니 과제 수는 늘어난 반면 국책과제에 대한 집중 투자 기회는 줄고 있다.
심판 선수 구분되지 않는 경쟁
1996년 첫 도입된 PBS의 핵심은 경쟁이다. 각 부처들이 R&D 과제를 내놓으면 연구기관들은 경쟁을 통해 이를 수주해야 한다. 사업을 따지 못하면 연구비도 받을 수 없게 했다. 도입 초기 PBS 제도는 연구계에 긴장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사업 기획과 평가 때 논문, 특허 등 양적 지표들이 강조되면서 연구시스템을 왜곡시켰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출연연구소 연구원 A씨는 정부 R&D 과제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년 기획에 참여한 사업 중 일부를 자신이 직접 수주했다. 기획자가 연구를 따내는 일명 ‘셀프 과제’로 의심되는 사례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최근 산업기술평가관리원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5년간 1271건의 중장기 R&D 과제 중 기획위원이 직접 과제를 맡은 사례가 568건에 달했다. 조사 대상 중 44.7%다. 기획자가 소속된 기관이 과제를 따낸 건수도 224건, 17.6%를 차지했다.
연구보다 영업 잘해야 인정
연구자들이 본업인 연구보다 사업 수주에 더 많은 힘을 쏟게 된 것도 부작용 중 하나다. ETRI, 한국전기연구원 등 응용기술 개발이 많은 출연연은 정부가 과제와 상관없이 주는 예산인 출연금 비중이 각각 14.6%와 26.6%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밖에서 벌어야 직원들 월급을 줄 수 있다.
이런 여건에서 도전적인 연구에 나서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사업화 성과보다 논문, 특허 등을 먼저 챙겨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구를 잘하는 사람보다 정부 부처를 드나들며 과제를 많이 따오는 사람이 대접받는 게 PBS의 또 다른 모순이다. R&D 예산을 관리하는 기관의 한 관계자는 “출연연의 예산구조를 보면 외부에서 수주한 사업 예산을 모아 누더기 옷을 만든 형국”이라며 “연구 기관 고유의 특성에 맞는 새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출연연 자체 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제당 평균 예산 2억6000만원 불과
작년 정부 R&D 예산 17조1784억원 가운데 국방, 인문·사회를 제외한 과학기술 분야 예산은 12조원대다. 이를 지원받아 수행한 과제는 4만5000여건에 달한다. 예산이 늘었지만 과제 수도 늘어나 과제당 평균 예산이 2억6500만원에 불과하다.
응용기술을 개발하는 산업통상자원부가 과제당 6억6500만원, 기초 분야의 미래창조과학부가 과제당 4억3200만원으로 비교적 많을 뿐 보건복지부, 교육부, 중소기업청 등은 모두 1억원대다. 세계 시장에서 통할 사업화 성과를 내기에는 턱없이 적은 액수다.
PBS 도입 후 출연연의 중장기 연구가 줄어드는 대신 단기성과 위주의 프로젝트가 늘어난 게 원인이다. 단기 과제를 수주하다 보니 인건비 절감 방법으로 비정규직 인력 고용이 자리 잡았다. 올해 출연연 비정규직은 전체 1만864명 가운데 4586명으로 30%에 달한다.
금동화 한국공학한림원 부회장(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은 “PBS 도입 후 정부가 R&D 기획을 주도하면서 예산 확대 측면에서 추진력이 생기고 단기 과제에서 경쟁을 유발한 것은 장점”이라면서도 “중장기 국가 과제를 맡아야 하는 출연연에까지 PBS를 적용한 것은 부작용이 더 많았다”고 평가했다.
■ PBS
project based system. 연구개발(R&D)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997년 당시 과학기술처가 도입한 제도. R&D 과제를 배정할 때 연구기관 간 경쟁을 시켜 이를 따낸 기관에 연구에 필요한 인건비·간접비 등을 주는 방식이다. 성과와 관계없이 인원에 따라 예산을 주던 방식에서 벗어나 연구 수주와 예산을 연계시킨 게 특징이다.
김보영/김태훈/심성미 기자 w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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