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태 정치부 기자, 국회반장) 지난 23일 여야 정치권은 공무원 연금개혁, 자원외교 국정조사, 청와대의 ‘비선실세' 의혹에 대한 국회 운영위원회 소집 등 이번 임시국회 쟁점현안을 ‘원샷’으로 합의했다. 19대 국회에서 보기 드물었던 협상정치의 물꼬는 이날 오전부터 터져나왔다. 여야 원내지도부와 국토교통위원회 여야 간사가 머리를 맞대고 정부가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위해 추진해온 ‘부동산 3법’을 연내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분양가상한제 탄력적용 등 부동산 3법이 입법발의된 후 2년여만에 국회 문턱을 넘었다.
올 해 두 번의 선거(지방선거와 보궐선거)를 치르는 와중에 터져나온 ‘세월호 침몰’ 참사를 비롯해 최근 청와대 비선실세 의혹까지 극한 대치만 벌였던 여야가 14년만에 법정기한(12월2일) 내 예산안을 통과시킨데 이어 쟁점현안까지 일괄처리하면서 갑오년의 대미를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여야가 의회민주주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박수받아 마땅한 여야 지도부의 협상에는 ‘옥에 티’가 숨어 있다. 이날 ‘원샷 협상’의 키를 쥔 쟁점은 운영위원회 소집을 언제 하느냐였다.“하루라도 빨리 열자”는 야당과 ‘검찰수사발표’ 이후로 가이드라인을 정한 여당간 절충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싱겁게 났다. 여야간 정치적 이해득실이 아닌 원내대표단의 출장 스케줄이 최우선 고려된 것이다. 운영위 소집일이 1월 9일로 정해진 것은 여야 원내지도부와 운영위원회 소속 의원들의 말레이시아 집단출장 일정(1월3~8일)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날 국회출입 막내 기자들은 협상장 밖에서 대기하면서 최종발표만을 기다렸다. 협상 실무책임자인 김재원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와 안규백 새정치연합 원내수석부대표 등을 오전 내내 따라붙으며 귀동냥을 한 덕분에 여야 협상은 세부적 내용까지 상세하게 알려졌다.
오후 3시께는 운영위 소집일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기자들이 현장을 지킨 것은 혹시 모를 협상조항 변경과 ‘최종 팩트 확인'이란 직업정신에서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발표는 늦춰졌다. 오후 4시30분께 협상장에서 웃음소리가 들렸고, 곧 최종 결과를 발표하겠다는 말도 전해졌다. 기사 데드라인을 턱밑에 둔 신문기자들은 여야 회동하는 장면을 연출하겠다며 카메라기자들을 따로 불러 여유있게 포즈를 취하는 장면을 조바심을 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어 합의문을 다듬는다는 이유로 발표가 또 늦춰져, 결국 최종발표는 오후 6시10분께야 이뤄졌다. 대부분 언론은 마감시간을 넘겨 이미 알려진 내용이긴 하지만 ‘최종팩트확인’ 없이 기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언론에 대한 ‘무배려’에 협상단을 흘겨보던 기자는 기사를 마감한 후 “운영위 소집일이 왜 9일일까”란 의문이 생겼다. 순간적으로 여야 지도부 해외출장 스케줄이 떠올랐고, 확인해보니 원내지도부와 국회 운영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내년 1월3부터 8일까지 5박6일 일정으로 말레이시아를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다시 의문이 생겼다. 출장일정상 운영위 소집이 아무리 빨라도 9일 밖에 없었다면 오후내내 지리한 협상을 벌인 이유는 도대체 뭘까?
협상발표 지연에 대한 석연치 않은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했다. 약속장소에 만난 한 보좌관은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더 늦을 줄 알았는데...”로 말문을 열었다.“그러게. 뻔한 협상발표를 왜 그렇게 질질 끄는지 모르겠어”라고 기자가 궁시렁거리자 생각지도 못한 말을 ‘툭’ 던졌다.
“기자들에게 운영위 소집일을 9일로 정한 이유를 설명하기가 마땅치 않았고, 마감시간을 일부러 넘겨 발표한 게 아닐런지..”라고 말했다.선뜻 이해를 못하는 기자가 재차 의문을 표시하자 “운영위 소집을 9일로 잡았는데.기자들이 왜 하필이면 9일이냐 물을 것이고.그러면 연초 출장계획이 잡혀 있는 여야 대표단의 답이 궁색할 것이고..늦게 발표하면 그런 질문이 묻힐 가능성이 크지 않겠냐”고 설명했다.
“설마”라고 했지만, 3시30분께 협상장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와 이어진 사진촬영, 협상문구 수정에 걸린 시간 등 모든 정황은 보좌관의 음모론적 추측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의 이해할 수 없었던 ‘연막작전’도 떠올랐다. 김 수석부대표는 협상문 작성이 끝난 후 “운영위 소집일이 9일 맞죠"라고 묻는 기자들 질문에 ”누가 그래요?”라고 응답해 막판 기사를 손질하던 기자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물론 이 보좌관의 추정은 ‘팩트’가 아닐 가능성도 크다. 만약 협상단이 외유성 출장일정과 운영위 소집일과의 연관성을 숨기기 위한 ‘연막작전’이었다면 ‘꼼수정치’란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기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여야 원내대표와 수석부대표 등 4명은 협상 후 말레이시아 출장단 명단에서 이름을 뺀 것으로 전해진다. 괜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진짜 ‘꼼수’를 부린게 아니었을까 하는 심증만 굳어질 뿐이다.(끝)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