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상 지음 / 강석기 옮김 / 문학동네 / 320쪽 / 1만2000원
[ 서화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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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살다》는 정조를 비롯해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초의선사, 이조묵 등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서재 24곳을 통해 그들의 삶과 가치관, 지향했던 세계를 들여다본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전통시대의 서재는 학문과 아취를 상징하는 특별한 장소였다. 지식인으로서의 삶은 서재에서 시작되고 갈무리됐다. 서재 이름을 별호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홍대용의 담헌, 박지원의 연암, 김정희의 완당, 정약용의 여유당이 모두 그랬다. 서재 이름에는 삶의 방향과 시대에 대한 고민, 서재 주인의 기호가 담겨 있었다. 따라서 서재 이름은 그 주인의 삶을 이해하는 단초이자 당대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홍재’에는 어진 정치를 평생의 뜻으로 삼았던 정조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학문을 갈고 닦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산 정약용이 서재에 붙인 당호 ‘여유당(與猶堂)’에는 정쟁에 휘말려 숱한 시련을 겪은 다산이 스스로 경계하는 뜻이 담겨 있다. ‘여유’는 ‘여(與)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하고 유(猶)가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도덕경’ 15장에서 따왔다. ‘여’는 큰 코끼리, ‘유’는 의심이 아주 많은 동물이다. 육중한 코끼리가 살얼음이 언 냇물을 건너려면 조심할 수밖에 없다. 의심 많은 짐승이 사방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도의 궁핌함 속에서도 ‘논어’를 병풍 삼고 ‘한서’를 이불 삼았던 ‘책바보’ 이덕무의 ‘팔분당’, 서재에 102개의 벼루를 갖추고 밭 대신 벼루를 갈았던 조희룡의 ‘백이연전전려’, 과학보다 문사철(文史哲)을 중시했던 시대에 수학과 기하학 연구에 몰두했던 유금의 ‘기하실’, 선비의 사적 공간인 서재를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기와 유재소의 ‘이초당’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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