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프런티어 시대, 전문대에 길을 묻다] '최연소 데뷔' 용이 감독 "장그래의 마음으로 살았다"

입력 2015-01-05 07:00   수정 2015-08-30 22:27

⑩용이 감독(계원예대 영상디자인과 졸)
CF·뮤비·영화 넘나드는 전천후 플레이어
"약자 입장에서 생각"… 사회적 메시지도



지식경제사회에 걸맞은 인재상은 '간판보다 실력'입니다. 안전제일 직업관을 벗어던지고, 청년층이 잡프런티어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스펙초월 채용문화'로의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한경닷컴과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는 전문 지식인과 맞춤형 전문대 교육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광화문 이순신 동상이 ‘유쾌 상쾌 통쾌’를 외치는 메가패스 광고, ‘당신의 피로회복제는?’이란 문구로 어필한 박카스 CF, ‘토크 플레이 러브’를 내세운 애니콜 광고 ‘인생의 3요소’ 편까지. 세월이 꽤 흘렀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모두 용이 감독(41·사진)의 손을 거친 히트작이다. 그는 남다른 센스와 독특한 아이디어로 주목받았다. CF뿐 아니라 뮤직비디오, 영화를 넘나들며 영상을 만들어 왔다. 업계 최연소 감독 데뷔 타이틀도 갖고 있다. ‘올드 보이’ 등 몇몇 영화에 조연과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감각적인 재주꾼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며 용 감독을 만나러 갔다.

직접 마주한 용 감독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인터뷰 내내 솔직하고 진지했다.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담담히 말했다. 흔히 연상하는 ‘15초 승부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와 비슷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극중에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졌다’, 한 번 실패해 여기 왔다고 하잖아요. 저는 4년제대 입시에 떨어지고 전문대(계원예술대 영상디자인과)에 갔습니다. 학벌 콤플렉스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만회하려고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마침 학과 공부가 적성에 맞기도 했고요.”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는 도제 시스템이 강한 광고계에서 25살 나이로 입봉했다. 업계 평균보다 10년 이상 빠른 데뷔였다. 손꼽히는 실력자들을 만나 일을 배운 건 행운이었다. 용 감독이 대학 때 현장실습 나간 영상프로덕션 대표 겸 감독이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졸업 후엔 톱 CF 감독 박명천 대표가 설립한 매스매스에이지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데뷔했다.

지금은 독립 CF 프로덕션 도날드시럽 대표를 맡고 있다. 겸임교수로 모교 후배들도 가르친다. 작년 12월엔 ‘2014 자랑스러운 전문대학인 상’을 받기도 했다.

CF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상업 광고만 만드는 건 아니다. 영상에 메시지를 담아내려 노력한다. 실제로 그는 ‘동물자유연대’ 광고로 2012년 한국광고대상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용 감독은 “평소 약자 입장에서 많이 생각하는 편” 이라며 “88만 원 세대의 아픔, 세상살이에 대한 공포, 이유 없는 적막이나 슬픔 같은 것들을 영상화해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 예명인 줄 알았다. 회사 이름도 특이하고.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영어 이름은 도날드다. (웃음) 지금 대표를 맡고 있는 CF 프로덕션 이름도 도날드시럽이다. 계원예대 영상디자인과 겸임교수도 하고 있다. 모교 후배들 2학년 졸업작품 위주로 가르친다.”

- CF 감독으로 유명하다. 최연소 데뷔로 들었는데.

“처음 CF 일을 한 게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현장실습 나가서였다. 당시 프로덕션 대표가 감독님이 김종덕 문체부 장관이었다. 그곳에서 업계 일을 배웠다. 몇 달 현장실습 마치고 군대 다녀와서 곧바로 이쪽에 취직했다. 프로덕션에서 같이 일하던 선배 감독이 새로 CF 프로덕션을 만들어 나갔다. 그분이 박명천 감독님. 20대로만 이뤄진 회사였다. 파격적이었다.

당시 광고계는 도제 시스템이 강했다. 오래 조감독 생활 한 뒤 감독 데뷔하는 시스템이었다. 30대 중반도 빨리 입봉한다고 했다. 그런데 젊은 회사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엄청난 화제가 됐던 TTL 광고가 이 회사(매스매스에이지) 작품이었다. 지금은 국내 톱 프로덕션이 됐다. 거기서 조감독 생활을 했다. 회사가 급성장하다 보니 내게도 기회가 빨리 왔다. 당시 최연소 감독(25세)으로 데뷔했다. 너무 어려서 고객들에겐 나이를 29살이라고 속이기도 했다.”

- 사람들이 기억하는 광고를 많이 만들었다.

“박카스 ‘당신의 피로 회복제는?’ 시리즈를 만들었다. ‘토크 플레이 러브’, 애니콜 ‘인생의 3요소’ 편도 반응이 좋았다. ‘철수, 영희, 바둑이’를 많이들 기억하더라. (웃음) 보람 있었던 작품은 뉴 아우디 A6 광고. 수입차 브랜드 광고를 아시아에서 제작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원래 독일 본사가 만든 광고를 한글화 하는 정도였는데, 그때 이후 국내에서 직접 제작하고 있다.”

- 뮤직비디오와 영화도 연출했다. 광고와는 또 다른 분야 아닌가.

(용 감독은 버스커버스커 ‘처음엔 사랑이란 게’, 악동뮤지션 ‘200%’, 뜨거운 감자 ‘고백’, 강산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등 여러 뮤직비디오와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를 연출했다.)

“TV 드라마를 빼면 영상 쪽은 거의 다 경험해봤다. 영화는 한 편밖에 못해봐서 기회가 되면 더 해보고 싶지만. 다양한 미디어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건 복 받은 일이다. 분야별로 차이는 있지만 모두 흥미롭다. 글 쓰는 사람이 소설 썼다가 시 썼다가 카피라이터가 돼 상업적 글도 쓰는 것처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 전문대 진학을 택한 계기가 있었나.

“처음부터 전문대에 가려 했던 건 아니다. 전기, 후기로 나누던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다. 다음해 입시가 바뀌니까 재수생들이 몰려서 경쟁률이 셌던 해였다. 전기에 서울의 4년제대 미대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나름대로 하향지원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력이 안 됐던 모양이다. 재수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다니던 미술학원 선생님이 계원예대를 소개해 줬다.

새로 생기는 학교인데 국내에 디자인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이 없으니 괜찮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학교 팸플릿을 봤는데 참 신선했다. 그래서 시험을 봤는데 충격을 받았다. 그 전에 한양대 미대 실기시험도 응시했었다. 수험생들이 그때보다 더 잘 그리는 거다. 경쟁률도 10대 1이 넘었고. 떨어질 수 있겠다고 걱정했으나 다행히 합격했다.”

- 유학파냐고 묻는 질문에 전문대 출신임을 꼭 밝힌다고.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처럼 생각했다. 나는 한 번 실패해 여기 온 거라고. 만회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했다. 학벌 콤플렉스가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이쪽 일이 공채 개념이 아니라 큰 차별은 없었지만, 함께 일하는 분들이 대부분 명문 미대 출신이다 보니 후배이겠거니 하더라. 유학파냐고 물을 때도 있고. 불필요한 오해를 낳기도 해서 정확히 밝히곤 한다.”

- 학교 생활에 대한 기억은 어떤지.

“굉장히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계원예대에 간 건 행운이었다. 해외에서 공부한 교수님들이 여러 나라의 좋은 커리큘럼으로 가르쳤다. 학생들의 실력도 웬만한 4년제대 못지않았다. 오히려 기존 학교들보다 새로운 시스템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장점이 있었다. 신설 학교라 내용면에선 참신한 시도를 많이 했다.”

- 재학 중에 데뷔한 걸로 안다. 대학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중고교 땐 학교 가기 싫었다. 대학 때는 학교에 너무 가고 싶었다. 관심 있던 영상 분야를 하나라도 더 배우니 신나게 했던 것 같다. 워낙 학기 중 수업 과제도 버거운 학과라 계절학기 특강 땐 아무도 과제를 안 했는데, 수업 듣는 학생 40명 중 나만 제출한 기억도 난다. (웃음)

고1 때부터 일기에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써놨더라. 미대 입시를 준비했었지만 영상 쪽이 체질에 더 맞았던 거다. 방학 동안 현장실습을 많이 한 것도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아줌마’란 단편영화가 계원예대 졸업작품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내가 기획과 프로듀싱을 하고 ‘시실리 2km’ 신정원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 영화 데뷔작을 괜찮게 봤다. 후속작 계획은 없나.

“내게 영화란 생존을 위한 벌이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내 안에 쌓인 생각들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로망에 가깝다. 첫 영화를 만든 게 20대 후반이었다. 영화를 온전히 뽑아내기엔 서툴고 미숙했다. 무엇이 됐든 두 번째 영화는 장르나 자본의 핑계를 대지 않고 마음껏 해보고 싶다. 꼭 상업영화가 아니더라도 독립영화를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 상업 광고만 하는 건 아니더라. 추구하는 영상 철학이 있다면.

“기본적으로 평소에 약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편이다. 2012년 광고대상을 받은 동물자유연대 광고도 그런 맥락이다. 버려지는 동물도 이 사회에선 일종의 약자 아닐까. 일이 ‘생존을 위한 벌이’이기도 하지만, 그것 외에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참여하려고 한다.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 뮤직비디오는 88만 원 세대의 슬픔을 표현한 작품이다. 뭔가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지만 결국 남는 게 뭘까.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사탕발림 같은 가벼운 ‘힐링’이 아니라 쓰라리고 엄중한 현실을 바라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 스물다섯에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일종의 경험담인가.

“그 나이에 느끼는 사회의 비정함을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했다. 세상살이에 대한 공포가 있지 않나. 학교를 졸업하고 마치 온실에서 나온듯한 막막한 기분. 한편으론 이유 없는 적막과 슬픔. 그런 것들을 영상화 시켜서 보여주고 싶었다.”

- 이번에 ‘자랑스러운 전문대인 상’을 받았다.

“상을 받았지만 여러 생각을 했다. 커뮤니티 내에서 프라이드를 갖는 건 좋다. 다만 어떻게 보면 ‘전문대 출신’이란 언어에 갇히는 것 같기도 하다. 전문대 나오고 결과를 냈으니 평가받는 거지만, 반대로 성과가 안 좋으면 ‘가방끈 짧으니 그렇지’ 하는 시선으로 보지 않나.”

- 전문대 출신이란 게 걸림돌이 된 적 있었나.

“솔직히 현업에서 큰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다. 학력보단 실제로 성과를 내느냐가 중요하다. 말 그대로 현장 승부의 세계니까. 다만 다른 분야, 예컨대 강의를 한다거나 할 땐 학사학위나 박사학위 등을 보더라. 공기업 등 큰 조직에 협력업체로 등록할 때도 학력 부분을 거론하기도 하고.”

-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학력 꼬리표를 붙이지 말자는 얘기로 들린다.

“우리 사회는 수직 구조에 대한 강박이 있는 듯하다. 누군가 만나면 꼭 나이를 따져 위아래를 정한다. 학력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고졸신화’란 말이 가장 대표적인 학력차별 용어 같다. 아닌 척 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으로 선을 그어놓고, 예외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용어 아닌가.

그래서 전문대든 특성화고든 새로운 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한다기보다 ‘언어에 갇힌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문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잘했다는 칭찬보다 애초에 전문대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 나에게 전문대란…

전기대(4년제대)에 붙었으면 오히려 더 큰일 났을 것이란 얘기를 많이 한다. 사실 점수 맞춰 하향 지원 하느라 원하는 전공에 지원하지도 못했었다. 만약 거기 합격했다면 하고 싶은 공부도 못했겠지. (전문대라도) 팸플릿만 봐도 가슴 설레는 학과에 들어간 것, 이 학교를 만난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원하는 분야에서 마음껏 배우고 일할 수 있어서 지금까지 온 것 같다.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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