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시장은 지난 한 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줬다. 1억여건의 카드 정보가 유출되는 초유의 사건이 터졌고, 국민주택채권 위조로 나랏돈을 빼돌린 은행원도 등장했다.
그중 제일 실망스러웠던 건 도를 넘어선 금융당국의 ‘갑’스러움과 무책임이다. ‘감 놓아라 배 놓아라’며 관료들은 금융회사 경영에 시시콜콜 훈수를 뒀다. 시장에 미칠 영향보다 관료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 행태도 많았다. 잘못을 지적받을 때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회장과 은행장이 극한대립했던 ‘KB 사태’에서 관료의 민낯이 잘 드러났다. 정부 지분이 한 주도 없는 민간회사의 최고경영자(CEO) 선임에 입김을 행사하면서부터 비극은 잉태됐다. 처벌 수위가 ‘중징계→경징계→중징계→직무정지’로 오락가락한 데서 금융당국이 ‘막장 드라마’의 주연임이 입증됐다. 잘못된 인사의 배후로 지목된 관료는 사태가 터지자 수습을 자임하고 나서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시장보다 집단이익 앞세워
이른바 ‘자살보험금’ 소동에서도 정부의 책임이 크다. 대법원은 2007년 판례에서 이미 자살보험금 관련 약관의 모호함을 지적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은 시정조치에 손 놓고 있다가 지난해 갑자기 보험회사들을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고 나섰다. 최수현 당시 금감원장이 “우리 직원들이 왜 지금 문제 삼고 나섰는지 잘 모르겠다”고 할 만큼 태만한 일처리로 파장을 키웠다.
정치권과 권력층에 대한 눈치보기도 심각하다. 관치금융을 넘어 정치금융이라는 말이 일상화될 정도다. 한 전직 금융관료는 “요즘 당국의 행태는 마치 1970~80년대 느낌”이라며 “공무원이었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 모든 금융회사의 CEO는 한 사람, 바로 금융당국’이라는 냉소도 퍼졌다. 리스크, 상품, 전략, 모든 문제에서 건건이 사전협의를 해야 풀린다는 자괴감이다. 창의적인 의사결정과 차별화된 상품개발이 원천봉쇄될 수밖에 없다.
독불장군식 행보는 금융시장 곳곳에 주름을 지우고 있다. ‘노조의 사인을 먼저 받아오라’는 면피성 요구에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협상은 제대로 꼬인 모양새다. ‘대주주가 있는 회사는 곤란하다’는 등의 이상한 이유를 들어 교보생명의 입찰을 막는 바람에 우리은행 매각도 무산됐다.
갈수록 확산되는 정책갈등
시장과의 엇박자는 정책문제로도 확산되고 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탈영병의 목을 벤 이순신 장군처럼 독하게 기술금융을 챙기겠다’고 몇 달 전 공언했다. 하지만 은행장들은 ‘올해 제일 우려되는 일’로 ‘정부의 기술금융 강요’를 꼽았다. 과도한 실적 점검에 슈퍼마켓 대출까지 기술금융으로 둔갑시키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신뢰가 무너지다 보니 ‘핀테크(금융+기술) 올인’도 명분 쌓기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구체적인 전략과 면밀한 액션 플랜이 빈약한 상태에서 구호만 크다는 지적이다.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는 것이냐.’ 프랑스혁명 당시 여걸 마담 롤랑이 동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휩쓸려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외친 말이다. 자유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인간의 탐욕이 혁명의 숭고함마저 훼손하는 데 대한 촌철살인이었다. ‘관료여! 오도된 사명감으로 얼마나 많은 방종을 행하는 것이냐’라는 마음속 질문을 새해에는 지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백광엽 금융부 차장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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