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칼럼] 디지털콘텐츠산업 相生의 길

입력 2015-01-29 20:40   수정 2015-01-30 05:04

"불공정거래 관행 만연해 있는 시장
산업 피해액만도 年 5천억원 육박
표준계약서로 창조가치 보호해야"

이영대 < 법무법인 수호 대표변호사·前 서울고법 판사 >



디지털콘텐츠 시장에서는 계약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모바일게임 제작사 A대표는 최근 게임 유통업체(퍼블리셔)가 한마디 언질 없이 바꾼 계약서를 받아들고는 3개월간 해오던 작업을 접어야 했다. 유통업체는 애초에 계약한 퍼즐 게임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역할수행게임(RPG)을 새로 제작해 처음 제시한 기한에 납품해 달라고 요구했다. 퍼즐 게임 제작을 위한 선급금은 이미 다 쓰고 난 뒤였지만 또 달라고 요구할 상황이 아니었다. A대표는 결국 사재를 털어 넣고 한 달을 꼬박 지새운 끝에 겨우 납품기한을 맞출 수 있었다.

A대표는 유통업체가 최종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며 제작사를 바꾸겠다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했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꼬투리를 잡고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다며 선급금 반환까지 요구하는 일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불공정한 일이지만 유통업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게임 유통이 어렵기 때문에 요구를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게임 분야뿐만이 아니라 영상, 광고, 출판, 애니메이션, 컴퓨터그래픽 등 디지털콘텐츠 산업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디지털콘텐츠 시장은 2009년 이후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지속해왔다. 그러나 단가 후려치기, 부당한 수익분배, 낮은 저작권 인식 등으로 인해 대부분의 제작사들은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디지털콘텐츠 시장에는 콘텐츠 제작사는 많은 반면 유통업체는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유통업체의 목소리가 셀 수밖에 없다. 또 디지털콘텐츠는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고, 유통기한도 없기 때문에 소위 ‘갑’의 위치에 있는 유통업체는 제작사에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십상이다.

불공정 행위라고 해서 섣불리 신고도 하지 못한다. 2013 콘텐츠산업 거래실태 조사에서 5000개 사업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불공정거래 피해를 경험한 업체 중 3.6%만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나마 27.2%만이 문제를 해결했을 뿐이다. 자칫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대부분 제작사들이 불공정거래를 감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콘텐츠 제작사의 불공정거래 경험률은 56.9%에 이르며 불공정거래로 인한 산업 피해액은 연간 4746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실제로 불공정거래에 대해 ‘심각하다’고 답변한 제작사는 70%에 이르렀다. 신고할 수 있는 기관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 같은 제작사들의 고충을 수렴해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해 말 디지털콘텐츠 제작 및 유통에 관한 5종의 표준계약서를 공시했다. 디지털콘텐츠 유통업체 같은 ‘슈퍼 갑’과 영세 제작사 모두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담았다. 하지만 표준계약서 확산은 낙관적이지 않다. 유통업체들은 자신이 유리하게 쓸 수 있는 계약서를 두고 왜 굳이 표준계약서를 쓰느냐는 입장이다. 사용에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영세 제작사 같은 ‘을’이 먼저 표준계약서를 쓰자고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디지털콘텐츠 표준계약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할 제작사의 저작권 귀속, 대금정산, 무단변경 금지 등을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그래서 법률 자문과 피해구제를 돕는 ‘디지털콘텐츠 상생협력지원센터’라는 울타리를 짓고 디지털콘텐츠 표준계약서라는 동행의 길을 만들었다. 디지털콘텐츠 보호는 이를 창조한 인격체에 대한 존중이며, 기본적 인권의 문제다. 중소제작사의 권익이 보장돼 개인의 창의성이 발휘되는 환경에서만이 양질의 콘텐츠가 생산·유통·소비될 수 있다. ‘내’가 아닌 ‘우리’를 담은 디지털콘텐츠 표준계약서가 당연해지는 디지털콘텐츠 산업 생태계를 기대한다.

이영대 < 법무법인 수호 대표변호사·前 서울고법 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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