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투자 정상화 아닌 위기 징표
투자활성화로 도약발판 다져야
이제민 < 연세대 교수·경제학 leejm@yonsei.ac.kr >
경제학자들은 1950~1973년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이 기간에 선진국, 특히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와 일본이 고도성장을 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초토화된 경제가 1950년께는 회복됐지만,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앞날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전 수십 년간 자본주의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2차대전 전에는 대공황, 그전에는 1차대전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러시아와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선진국 경제는 직전의 위기 시대뿐 아니라 1차대전 이전의 ‘좋았던 옛날’보다 훨씬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성장의 기본 성격은 위기의 시대에 미국에 뒤처졌던 유럽과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은’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런 성장이 창출하는 수요에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 황금기는 1973년에 끝났지만, 그 여위(餘威)는 이어져서 결국 위기 시대의 산물이었던 공산체제를 붕괴시켰다. 그것은 제3세계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 처음에 자본주의는 과거 제국주의의 ‘업보(業報)’ 때문에 수세에 몰렸지만, 황금기를 거치면서 상황이 변했다.
그 결과는 어떤가. 자본주의의 ‘새 황금기’가 더 넓은 범위에서 전개됐다. 옛 공산권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이 자본주의에 편입되면서 선진국 따라잡기 성장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을 위시한 이들 국가의 규모가 커지자 세계 경제가 호황으로 돌입했다. 호황은 2008년 말 세계 금융위기로 중단됐지만, 중국이 대규모 확장정책을 폄으로써 위기의 강도를 결정적으로 낮췄다.
이런 구도에서 한국의 위치는 어떤가. 한국은 일찍이 자본주의 황금기에 끼어들어 ‘경제 기적’을 이뤘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냉전 종식으로 한국에 바로 불똥이 튀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냉전이 지속됐으면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이다. 위기 후 취해진 ‘국제통화기금(IMF) 개혁’은 옛 소련에서의 ‘충격 요법’과 닮은 점이 있다.
위기 후 한국 경제의 모습은 어떤가. ‘개혁’의 결과 투자는 부진한 반면 자본주의의 ‘새 황금기’ 덕분에 수출은 잘된다. 총투자 증가율은 위기 전 16년간(1981~1996) 평균 11.6%였지만, 위기 후 16년간(1998~2013) 2.9%로 떨어졌다. 반면 수출 증가율을 미국 물가를 감안한 실질 달러 가치로 계산해 보면 위기 전 17년간(1980~1996) 평균 8.9%에서 위기 후 17년간(1998~2014) 평균 7.0% 정도로 소폭 떨어졌을 뿐이다.
한국이 수출을 늘려 ?수 있는 것은 새로 편입된 국가 중 가장 큰 중국과 지리적·문화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다. 2008년 위기 때도 한국은 중국의 확장정책의 덕을 가장 많이 봤다. 최근 2~3년간은 중국의 성장 감속으로 타격을 받고 있지만, 그런 구도가 바뀐 것은 아니다.
문제는 수출은 그냥 ‘수요’인 반면 투자는 수요이면서 ‘공급 능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투자를 안 하면 수출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위기 후 투자 증가율이 대폭 떨어진 것을 어떻게 보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다수설은 위기 전의 ‘과잉투자’가 정상화되면서 위기 후에 투자 증가율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기가 한국에 ‘위장된 축복’이 될 것이라는 위기 당시 지배적 견해의 연장이다.
옛 소련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요법’을 합리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 경제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이유로 그와 비슷한 ‘IMF 개혁’이 적절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중국 같은 나라의 성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따라잡히는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민 < 연세대 교수·경제학 leejm@yonsei.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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