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의 여의사' 칠순잔치 열어 준 '84세 노신사'

입력 2015-03-09 22:06   수정 2015-03-10 04:13

벨기에 출신 배현정 원장, 시흥동 판자촌서 43년간 의료봉사
'성천상' 수상으로 이종호 회장과 인연…작년 10월 대한민국 국적 취득

벨기에 대사도 참석해 고희연 축하



[ 조미현 / 김형호 기자 ]
배현정 전진상의원 원장
“대한민국 사람으로 여는 첫 생일잔치, 상상도 못했는데…마음 써줘 감사합니다”

이종호 JW중외그룹 회장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소외계층 위해 헌신한 배 원장의 칠순잔치 함께해 기쁩니다”

‘스물여섯 벨기에 아가씨’에겐 한국이 낯설고 두려운 나라였다. 1972년 서울 시흥동을 찾은 그의 눈에는 ‘다 쓰러진 판자촌에서 배고픔과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후미진 좁은 골목을 지날 때면 철없는 아이들이 “미국 사람이다”며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그가 지난 8일 고희(古稀)를 맞았다. 봉사단체인 국제가톨릭형제회 단원으로 한국에 온 뒤 43년간 시흥동 판자촌 주민을 위해 의료봉사 활동을 해온 배현정 전진상의원 원장 얘기다.

고희연은 이날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렸다. 배 원장의 칠순 잔치를 베푼 사람은 이종호 JW중외그룹 회장(84)이다. 이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중외학술복지재단이 2013년 제1회 성천상 수상자로 배 원장을 선정하면서 두 사람은 인연을 맺었다.

성천상은 사회적으로 귀감이 되는 참된 의료인을 발굴하기 위해 JW중외제약 창업주인 고 성천(星泉) 이기석 사장의 호를 따 만든 상이다.

이 회장은 “결혼도 하지 않고 소외계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배 원장에게 고희연을 챙겨줄 자식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칠순 잔치를 함께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배 원장은 지난해 10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올해 2월에서야 원래 이름인 마리 헬렌 브라쇠르 대신 배현정이란 이름을 법적으로 쓸 수 있게 됐다. 1972년부터 ‘어질고 곧다’는 의미의 현정(賢貞)이란 이름을 써왔지만, 국내 모든 공식 서류에는 벨기에 이름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온 뒤 서울 금천구에서 줄곧 살아온 그는 자신의 본관을 ‘금천 배 씨’로 정했다.

배 원장은 “한국에서 산 시간이 (벨기에보다) 더 많은 나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며 “영주권을 취득하고 세금도 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4년 전 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발급되는 무료 교통카드 신청은 거절당했다. 법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쉬웠다고 했다. 성천상을 받은 뒤 보건복지부의 행복나눔인상, 법무부의 올해의 이민자상을 잇따라 받았다. 작년 10월에야 대한민국 국익에 기여한 공로로 특별귀화 절차에 따라 국적을 취득했다. 배 원장은 “이번 고희연은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첫 생일잔치”라고 말했다.

배 원장의 고희연에는 이 회장과 배 원장의 친구 및 지인 50여명이 자리했다. 전진상의원에서 레지던트로 봉사활동을 한 첫 의사인 박영배 전 서울대 의대 교수도 참석했다. 이성낙 가천의대 명예총장과 프랑수아 봉탕 주한 벨기에 대사도 왔다. 이경하 JW홀딩스 부회장, 박구서 JW홀딩스 사장도 인사를 했다. 배 원장은 “벨기에에서는 칠순을 축하하는 전통 행사는 없다”고 말했다.

배 원장은 간호사로 진료소를 운영하는 데 한계를 느껴 1981년 중앙대 의과대학에 편입,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땄다. 매달 1000여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그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환자(월 200명가량)에게는 지금도 진료비를 받지 않는다. 배 원장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꾸준히 하면 길이 생긴다고 믿고 있다”며 “이웃을 사랑하고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기쁨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조미현/김형호 기자 mwi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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