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두현 기자 ] 동원호를 나포했던 소말리아 해적 두목이 2013년 첩보영화 같은 작전으로 체포됐다. 초대형 유조선 납치로 한 번에 200만~300만달러씩 챙긴 그가 해적질을 그만두는 조건으로 소말리아 정부로부터 면책특권과 외교관 여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알려졌다. 왜 하필 외교관 여권이었을까. 거기에 따라붙는 특권이 그만큼 세기 때문이다.
외교관 여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면책특권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가별로 사정은 다르지만 이들은 외국에서 비자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교통법규 위반 등 경범죄 처벌 면제와 불체포 특권, 재판을 받지 않을 권리도 갖는다. 공항 등에서 불시 소지품 검사를 따로 받지 않고 VIP 의전을 받으며 일반인의 시선을 피해 별도로 출입국할 수도 있다.
이런 특권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구약성서에도 기원전 450년께 페르시아 아르타세르세스 1세의 신하 느헤미야가 유대로 여행하겠다고 했을 때 왕이 ‘강을 넘어서도 효력을 발휘하는’ 문서를 써줬다는 내용이 있다. 외국의 관리들에게 특별대우를 부탁한 것이다. 중세 아랍이 세금 납부 영수증을 여권으로 쓴 것도 자국민 보호의 한 방법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여권제도를 처음 시행한 잉글랜드도 마찬가지였다. 1차 대전 때 보안상의 이유로 출입국심사 절차가 생긴 뒤로 외교관 여권의 가치가 더 커졌다.
그래서 발급 절차가 까다롭다. 일반여권이나 공무원·정부투자기관 임직원을 위한 관용여권보다 대상도 적다. 5년짜리는 전·현직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와 외무장관, 대사,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등에게 한정된다. 2년짜리는 특별사절이나 정부대표 등에게 발급된다. 이들의 배우자와 27세 미만 미혼 자녀도 포함된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이런 특권을 자신들에게도 달라는 내용의 여권법 개정안을 낸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국익을 위한 외교 활동에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실로 몰염치하고 옹색한 주장이다. 지금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는 외교관 여권이 발급되고 있다. 이번 개정안이 통과되면 의원 300명과 그 가족이 무더기로 외교관 특권을 받게 된다.
가뜩이나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은 판국이다. 의원 정수를 늘리자는 잠꼬대에 이어 이젠 외교관 여권까지 요구하다니. 그렇잖아도 국회의원 특권이 200개나 된다. 얼마 전 ‘특권 내려놓기’ 시늉을 할 때도 웃었지만 외교관 특권까지 갖겠다고 나서는 꼴을 보니 더 우습다. 특권이 많으면 비리도 늘어나기 쉽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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