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에서 그리스는 뿌리가 깊다. 그리스는 동심을 자극하는 신화로 인류의 상상 공간을 무한히 넓혀준 나라,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나라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자들이 사유를 펼친 곳이기도 하다. 문화의 뿌리가 깊어 세계인의 발길을 끄는 대표적 관광국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리스가 21세기 들어서는 경제적·정치적 파탄을 상징하는 국가가 됐다.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을 자극하는 정치인, 복지의 유혹에 빠진 국민, 모럴해저드에 젖은 부유층이 오늘날의 그리스를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포퓰리즘으로 고갈된 ‘국가체력’
20세기 그리스는 ‘우량국가’였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사회당이 집권(1981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는 경제성장도 괜찮은 편이었고, 부채도 그리 많지 않았다. 1929~1980년 그리스는 연평균 5.2% 성장했고, 실업률도 2~3% 수준의 견실한 나라였다. 그리스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할 1981년 당시엔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8%, 재정적자는 3% 미만이었다. 그런 나라가 불과 30년 만에 국가빚도 제대로 못 갚아 외부에 긴급구조의 손을 벌리는 나라가 됐다. 현재 그리스 국가부채비율은 GDP 대비 175%에 달한다. 포퓰리즘에 빠진 정치인들이 복지지출 비중을 지속적으로 높이면서 정작 국가의 영속성에 필요한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 다지기는 등한시한 탓이다.
1981년 취임한 파판드레우 총리는 노동자의 지위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 노조 편향적 입법을 추진하고 파업권을 보장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 임금은 빠르게 올랐지만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졌다. 외국 기업은 ‘노동 착취자’쯤으로 인식했다. 당연히 외국 자본이 고갈되고 외국 기업이 하나둘 그리스를 떠났다. 10년 만에 정권이 신민당으로 바뀌었지만 복지로 유권자를 현혹하는 포퓰리즘 정치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만연해진 모럴해저드
그리스의 지하경제 규모는 GDP의 25%에 육박한다. 미국의 7%, 프랑스의 11%(EU 통계청 자료)에 비하면 지하경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지하경제 비중이 높다는 것은 경제 주체들이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리스가 지난 10년 가까이 재정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부유층의 탈세와 공공부문에 만연한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2012년에는 HSBC은행 스위스 지점에 비밀계좌가 있는 기업인과 정부관리, 그리스 지도층 2059명의 명단이 발표되기도 했다. 정부는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돈의 흐름이 투명한 이른바 ‘유리지갑’만 쥐어짰고, 급기야는 서민들이 납세 거부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리스 전반에 포퓰리즘이 극성 ?부리면서 근로의식이 약해지고, 반대로 도덕적 해이 현상이 만연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 몫만 챙기는 공공노조
그리스 포퓰리즘의 최대 수혜자는 노조다. 파판드레우 총리가 집권한 뒤로 정치권은 지속적으로 복지 확대에 초점을 맞췄고, 노동자의 권익을 강화했다. 올해 취임한 치프라스 총리도 마찬가지다. 특히 공공부문은 그리스에서 ‘신의 직장’이다. 공공부문 근로자는 퇴직 후 연금액으로 퇴직 시 근로소득의 100~110%를 받기도 한다. ‘일자리를 위한 일자리’를 만들다 보니 예전엔 한 사람이 하던 일을 이제는 2~3명이 한다. 2001년 그리스에 위기가 찾아왔을 당시 과감한 구조조정과 경제체질 개선으로 재정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다시 집권한 사회당은 국가부채를 축소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가입했고, 이 덕에 낮은 금리로 국채를 발행해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이는 중환자가 링거를 맞고 일시 회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는 여전히 복지를 확대하고 성장의 기반은 약화시켰다.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디폴트 문턱 서성대는 그리스
그리스는 세계 경제의 뇌관이자 시한폭탄이다. 한고비를 넘기는 듯하면 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국가의 근본 체질이 바뀌지 않은 탓이다. 한동안 주춤하는 듯했던 그리스 디폴트(국가채무 불이행) 우려가 다시 커지고 있다.
이달 말과 6, 7월에 집중적으로 몰린 채무상환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하지만 ‘국가의 곳간’은 거의 빈 상태이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 등과 자금지원을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이 또한 ‘링거 효과’를 연장시키는 격이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할 것이라는 이른 바 ‘그렉시트’도 지속적으로 불거지는 상황이다.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의 유혹을 벗어나 진정으로 국가의 대계(大計)를 설계해야 그리스 경제가 바로 설 것이다.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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