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보다는 내것 챙기기 수단 전락
'선진화법' 폐기하고 다수결로 가야
김영봉 < 세종대 석좌교수·경제학 kimyb5492@hanmail.net >
지난 12일 여야는 경제활성화 법안 등 59개 법안을 처리하기 위해 ‘원 포인트 국회’를 열었지만 소득세법 개정안 등 3개 법안만 통과시키고 문을 닫았다. 160석을 가진 거대 여당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개정 합의’를 깼다고 노(怒)한 소수 야당의 허락을 받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국회선진화법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과거 많이 보았던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볼 희극이다.
한국은 ‘합의 정치’, ‘사회적 대타협’에 함몰된 국가다. 정치적으로는 선진화법이 도입돼 정부·여당은 매사에 소수 야당의 재가를 구걸하고 야당은 여당 정권의 실패를 위해 이를 거부하는 모순적 정치가 시행되고 있다. 모든 사회적 분쟁을 이해관계자가 대화해 대타협을 이루는 합의민주주의는 정당과 국민 수준이 충분히 이타적이고 양심적일 때 성취 가능한 것이다. 그 정반대인 나라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불능의 국가’로 남게 되는 게 상식이다.
사회적 합의는 본시 유럽의 유산이다. 유럽인의 삶의 태도는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2004)에서 잘 설명된다. 아메리칸 드림은 ‘자립’과 사유재산을 축적해야 얻어지며 그런 삶에서는 직업윤리가 중심적 가치가 된다. 반면 유러피언 드림은 자립보다 ‘사회적 소속’에 의존하는 삶에서 안전과 행복을 찾는다. 이는 더 많은 사회적 연고(緣故)를 가짐으로써 보장되며, 직업윤리에 충실하기보다 공동체의 의제(議題), 환경, 스포츠 같은 사회적 가치에 깊이 빠져야 의미 있고 만족한 삶의 가치를 얻는다는 것이다.
리프킨은 아메리칸 드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유럽식 삶이 장래 지구촌의 꿈이 된다고 했다. 이런 ‘공생(共生)의 사회’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목적한 사회다. 그는 유러피언 드림을 세 번 읽고 크게 감동해 참모들에게 ‘한국적인 적용’을 지시했으며, 이후 ‘대화·타협·관용’이 대한민국에 일대 유행어가 됐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합의의 사회가 현재 한국의 현실에 맞는지는 살펴봐야 한다. 유럽인들은 오랜 민주주의 습득 과정을 통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고와 행위 능력을 키워왔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의 탄생도 수많은 파괴적 전쟁과 갈등을 경험한 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호 투쟁으로 공동체 전체에 재난이 닥치는 일은 종식시켜야 한다는 그들의 결의에서 출발했다.
반면 짧은 민주주의 과정에서 한국의 정치 집단은 민주주의를 떼쓰기와 지역 이기주의를 부추겨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빈번하게 활용해왔다. 그 과정에 국민은 민주주의를 상호 공존 의식을 기르기보다 사생결단으로 내 것을 지키는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았나 의심된다. 유럽인들은 독일의 ‘하르츠 개혁’이나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처럼 자신의 직장과 임금을 양보해 국가에 고용 창출과 성장 활력의 기반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반면 우리의 요란했던 지난달 노·사·정 대타협 소동은 이해단체가 한 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이기적 집단인 것만 보여주고 끝냈다. 우리의 대타협 민주주의는 초등학생이 대학원 학습을 하는 것처럼 어려운 시도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국회가 ‘선진화법 시대’에 돌입한 이래 여야는 모든 법률을 당리당략과 연계해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목적과 당위성이 다른 법안들을 이리저리 묶어 다른 법안 다발과 ‘빅딜’하고 장내외 투쟁 해결의 대가로 던지는 따위의 행태는 문명국의 입법자가 아니라 야만인이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다. 이런 흥정과 야합의 버릇이 거듭되며 우리 국회의원들은 매일 더 타락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가 할 일은 민주주의의 기본, 곧 다수결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첫걸음으로 국회선진화법부터 폐기해야 한다. 국회선진화법이란 헌법 49조가 규정하는 ‘과반수 출석, 과반수 찬성’의 원칙을 위배한 반(反)헌법적 법률이며, 사회적 타협의 본산인 유럽 국가에도 없는 법률이다. 이런 법을 도입한 새누리당은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김영봉 < 세종대 석좌교수·경제학 kimyb5492@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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