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
[ 김인선 기자 ] 5년여간 판사로 재직한 뒤 개업한 변호사에게 판사로 일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누군가의 원망을 사는 판결을 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대답했다. 그의 말인즉 판사는 주장이 치열하게 엇갈리는 쌍방의 의견을 검토해 판결을 내려야 하는 직업이다. 냉철한 판단력을 발휘해 공정하게 판결을 내리더라도 당사자 중 반드시 한쪽은 판결에 만족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22일 오후 3시께 서울고등법원 417호 대법정에선 방청객 150여명의 원성을 산 판결이 내려졌다. 사기성 기업어음(CP)을 발행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은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였다.
최재형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1조3000억원 상당의 사기CP와 회사채를 발행해 일반 투자자 4만여명에게 피해를 준 이른바 ‘동양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현 전 회장에게 1심보다 5년 감형한 징역 7년형을 내렸다.
최 판사가 판결 주문을 다 읽기도 전에 대법정은 난장판이 됐다. 재판 과정 내내 방청석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투자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 섟?항의했다. 한 50대 여성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되뇌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했고, 한 중년 남성은 “대한민국 법치주의는 죽었다. 자식 낳지 말자”고 고성을 질렀다. 일부 방청객 사이에선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설도 나왔다.
법정 경위들은 방청객과 재판석 사이에 놓인 가림막 앞을 호위무사처럼 둘러쌌다. 최 부장판사는 주문을 읽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배석판사 두 명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 연출됐다.
양쪽 이해관계자 모두가 납득할 만한 판결을 내리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날 벌어진 소란이 법조 선진국의 법정에서 그려질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씁쓸한 대한민국 풍경이다.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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