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보건복지부는 의료기기에 쓰이는 치료 재료 4800여개의 가격을 평균 8.3%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생산원가에 정부가 정한 일정 수준의 비용을 더해 가격을 정하고 그보다 높으면 일방적으로 가격을 깎겠다는 조치다. 평균 인하율은 8.3% 정도이지만 많게는 현재 판매되는 가격에서 60%까지 깎인 경우도 있다.
의료기기 회사들의 반발은 당연히 거세다. 한 해 1% 성장을 달성하기도 어려운데 하루아침에 가격이 깎이면 적자로 돌아선다며 한숨짓는 기업들도 있다. 의료기기는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정부가 정한 가격 이상을 받지 못하도록 규제를 받고 있다. 그래서 정부가 가격을 정할 때는 원가뿐 아니라 의료진에게 사용법을 교육하는 데 쓰는 교육비,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쓰는 연구개발(R&D) 투자비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원가와 판매·관리비만의 단순 셈법으로 가격을 깎겠다는 정책을 내놨다.
‘원가+판관비’란 단순 셈법
이번에 가격이 깎이게 된 의료기기는 부러진 뼈를 붙이는 응급수술에 쓰이는 티타늄 나사·막대를 비롯해 백내장 수술에 쓰이는 인공수정체까지 포함돼 있다. 이런 제품을 사용하려면 전문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회사가 의료진을 교육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응급 골절수술에 쓰이는 재료는 환자 개인마다 필요한 재료가 달라 수술이 이뤄질 때마다 업체가 병원으로 배송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복지부가 이런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가격만 깎는다면 결국 의료기기업체들은 병원과 의료진을 위한 서비스에 드는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정부는 지난해 의료기기산업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선정하면서 2020년까지 세계 7대 의료기기 강국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실제 국내 의료기기 생산실적은 최근 5년간 연평균 10% 이상 증가하며 고부가가치 수출 효자상품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성장이 의료기기 강국으로까지 연결되려면 R&D 투자가 필수적이다. R&D 투자 없이 신제품을 만들 수 없고, 경쟁과 기술 변화가 심한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건보재정 때문이라면 대안 고민을
미국 애플사가 아무리 혁신적이라고 해도 아이폰을 원가와 유통비만 받고 팔아야 한다면 신제품을 내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격 인하의 된서리를 맞은 의료기기업체들이 걸음마 단계의 산업을 정부가 주저앉힌다며 낙담하는 까닭이다.
복지부의 가격 인하는 건강보험재정의 건전한 운영을 위해서라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원가를 근거로 의료기기 가격을 정하지는 않는다. 재정 절감이 목적이라면 실거래가 조사 등 산업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재정을 절감할 수 있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황휘 <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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