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이에 둔 明과 倭의 다툼
임진왜란 졌다면 분단됐을 것
'戰時 宰相' 의 리더십 돋보여
역사학자는 과거 시각으로 서술
사회학자는 현실의 해결책 모색
류성룡 파직·이순신 전사 '같은 날'
[ 이미아 기자 ]
“임진왜란 당시 조선엔 애국심이란 개념이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서애 류성룡과 이순신 장군은 그때의 사고방식으로는 비주류였어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류성룡 연구자’로 손꼽히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최근 서울 불광동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7년 중 5년 동안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헤쳐갔고, 관직을 내려놓은 뒤엔 ‘징비록(懲毖錄)’을 통해 참혹했던 전쟁의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전시 재상(戰時 宰相)’ 류성룡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송 명예교수와 만났다.
송 명예교수는 “임금과 조정은 명나라에만 의지하고, 나라는 풍비박산이 난 극한의 시기에 투철한 호국 의식으로 실용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이 류성룡”이라고 강조했다. 또 “외교 안보 문제에 시달리는 건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점을 감안할 때 류성룡은 반드시 재조명돼야 할 명재상”이라고 역설했다.
송 명예교수가 류성룡 연구와 재해석에 나선 것은 과거사를 바로 알고 거기서 본받을 만한 리더십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2003년 연세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뒤 후학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요즘 젊은이들이 한문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며 “우리 역사가 담긴 한문을 통해 우리만의 리더십을 연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류성룡은 그런 그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띈 인물이었다. “선비정신과 학문의 깊이, 전문적 행정 능력을 모두 갖춘 조선의 유일한 재상이라 봤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송 명예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배운 한문 실력을 발휘해 류성룡의 징비록과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549건을 직접 번역했다. 번역을 위해 류성룡의 글을 모은 ‘서애전서(西厓全書)’를 풍산 류씨 문중에서 빌려 와 한 자 한 자 일일이 읽었다. 이 과정을 거쳐 쓰여진 송 명예교수의 류성룡 연구서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2007년)과 개정판인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2014년)는 서점가의 스테디셀러가 됐다. 송 명예교수는 “역사학자가 과거의 시각에서 과거의 사실을 서술한다면, 사회학자는 현실의 틀에서 과거사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이 시대에 맞는 해결책을 모색한다”고 말했다.
임진왜란에 대해선 ‘조선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일본이 벌였던 싸움’이라 지칭했다. 榴?“만일 임진왜란에서 졌다면 한강 북쪽은 명나라, 남쪽은 일본 땅이 됐을 것”이라며 “6·25전쟁 전 미국과 옛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점령통치했던 상황과 매우 닮았다”고 주장했다. 또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의 국력은 식량 부족과 관리의 부패, 시스템 부재 등으로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며 “율곡 이이는 임진왜란에 앞서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임금께 바치는 1만 글자의 문장)’에서 ‘나라가 고칠 수 없는 썩은 집과 같다’고 통탄했다”고 지적했다.
송 명예교수가 꼽은 ‘류성룡 리더십’의 세 가지 특징은 통찰력과 인재를 고르는 안목, 물러날 때를 아는 자세다. 그는 “류성룡은 바다를 지키지 못하면 일본군에 조선 최고의 곡창지대이자 나라 재정의 절반을 대던 호남 지역을 빼앗기리란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에 수군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육군의 말단 장수였던 이순신을 일곱 계급 승진시켜 호남 지역 수군을 이끌게 한 것도 그 이유였다. 송 명예교수는 “인재 등용을 위해서라면 파격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조정 대신들 중 류성룡만큼 민첩하고 전략적으로 행동한 관료는 없었다”고 말했다.
류성룡은 반대파의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경북 안동으로 낙향해 저술에만 몰두했다. 공교롭게도 류성룡이 파직된 날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1598년 11월19일이었다. “선조가 수차례 조정에 다시 돌아오라고 명했지만 류성룡은 단호히 거절하고 공성신퇴(功成身退·공을 세운 후 몸은 뒤로 물러선다)의 정신을 실천했다”고 송 명예교수는 설명했다.
징비록은 시경(詩經)의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내 지난날 잘못을 응징하고 훗날 닥칠 환란을 미리 경계한다)’이라는 구절에서 ‘징계할 징(懲)’과 ‘삼갈 비(毖)’ 두 글자를 따서 만든 제목이다. 송 명예교수는 “징비의 정신이 살아있었다면 온갖 국가 재난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지난해 4월 세월호 사건에 대해선 “비대하고 무능력해진 관료 조직의 한계가 가장 비극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라며 “부패 척결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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