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제화, 굳이어제화, 신신댄스화, 이태리제화, 무도화전문, 가르방…. 서울역 옆 염천교에서 죽 이어지는 구두가게 이름들이 정겹다. 1층은 도소매 가게들이고, 2~4층은 대부분 구두공장이다. 이곳 사람들은 다양한 디자인의 신사화를 비롯해 살사댄스용 무도화 등 맞춤 구두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판다.
구두 장인들의 경력은 20~30년. 나이는 대부분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이다. 한때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며 구두 만드는 기술만 갖고 남미까지 건너가 소금밥으로 버티던 김정무 씨, 20년 뒤 100세 구두 장인으로 TV에 나오는 게 목표라는 팔순 노익장 박상식 씨의 인생 드라마도 이곳 염천교 수제화거리에서 시작됐다.
광복 후 미군들의 중고 전투화를 개조해 구두를 만들었으니 출발은 미약했다. 그러나 1970~1980년대에는 전국 물량을 이곳에서 거의 다 댈 정도로 번성했다. 개화기 ‘모던 보이’들의 로망이었던 구두는 고무신과 운동화에 이은 신발 혁명의 대명사다. 70년대 중반 수제화 한 켤레 값은 1만4000원이었다. 당시 50원이던 짜장면 280그릇과 맞먹었다. 80년대 명동을 중심으로 유행한 ‘싸롱화’는 얼마나 많은 멋쟁이들의 뗌습?설레게 했던가.
수제화를 만드는 데는 1주일 정도 걸린다. 첫날 라스트(last·신발틀) 깎기, 이튿날 디자인, 3일째 패턴메이킹, 4일째 가죽 재단, 5일째 갑피(가죽 재봉질), 6일째 저부(가죽을 씌우고 굽을 부착), 7일째 품질검사의 순서다. 이런 공정을 거쳐 20만~30만원짜리 고급 맞춤화가 완성된다. 물론 이곳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품목은 5만원 안팎의 일반 신사화다. 백화점에 들어가면 3~4배 값이 뛰지만, 여기서는 신사임당 한 장이면 충분하다.
성수동 수제화거리가 주로 여성용 구두를 만드는 데 비해 이곳 염천교에서는 남성용 구두를 더 많이 만든다. 하지만 제화산업 쇠퇴와 값싼 중국제품 때문에 가게 문을 닫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났다. 현재 남은 건 100여곳에 불과하다.
다행히 서울시와 중구가 염천교 수제화거리 활성화 방침을 잇달아 밝히면서 이곳의 활력이 점차 되살아나고 있다. 공동 브랜드를 개발하고 주말 구두마켓을 개설하며, 점포별 추억과 사람들 이야기를 담아 홍보도 체계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에스콰이아, 탠디 같은 유명 브랜드들이 이곳에서 출발했으니 구두거리의 역사와 상징성도 충분하다. 인근의 서소문공원과 약현성당, 손기정기념관까지 연계해 국제적인 관광코스로 개발하면 더 좋을 법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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