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망조가 하늘을 찌르던 서기 876년.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선승 도선(道詵)은 송악산 아래 집을 짓던 호족 왕륭을 만난다. 새로운 국운을 짊어질 인걸지령(人傑地靈)의 터에 고대광실 난잡한 집. 끝내 도선은 풍수학을 접목한 건축설계변경을 단행한다. 이 장면을 고려사 세계편에는 ‘군우수명역수지대수(君又水命役水之大數)’라 적고 있다. ‘다음 군왕은 물의 명(命)인 수운(水運)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수(水)의 대수(大數)다’는 뜻이다.
대수(大數)란 숫자다. 즉 물의 특성을 가진 수(數)란 뜻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아는 수(數)는 다섯 가지의 특성을 지닌다. 소위 민용오재(民用五材), 즉 민간에서 생활에 필요한 중요 재료와 동일하다. 생명의 근원 물, 생명의 연장 불, 생명의 쓰임 나무, 생명의 도구 금속, 생명의 가색 땅이 그것이다. 이 각각의 특성이 수(數)에 붙어 그 특성을 대표하게 된다.
예를 들면 도선이 왕륭에게 건넨 건축설계변경 지시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작우위육육삼십육구(作宇爲六六三十六區)’, ‘하늘의 집(그릇)을 만들려면 육(6)×육(6)=삼십육 칸을 설계하라.’ 앞서 언급한 수운(水運)과 연결해 그 뜻을 음미하면 더욱 각별하다. 결국 ‘수운(水運)이 깃든 서른여섯 칸의 집을 지으면 왕이 태어난다’는 신라 역적모의가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2년 뒤 송악산 남쪽 서른여섯 칸의 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동양의 수(數) 육(六)은 물의 특성을 지닌 수(數)다. 일(一) 역시 같은 성질이나 땅을 대변하는 수는 육(六)이라 하여 지수(地數)라 이른다. 새 왕조를 건국할 인물이 태어날 국운지령(國運地靈)의 터는 다음 왕조의 국운인 수(水) 기운을 원했다. 땅의 기운과 건축물의 기운이 서로 맞아떨어졌을 때 안성맞춤 운명의 변화는 시작된다. 하여 풍수학을 개운학(開運學)이라 이름하고 운명 개척학이라 감히 얘기한다. 여기에 더해 인물의 문화·사회적 환경이 조화를 이루면 그 속도는 배가 될 터다. 왕건이 아버지 개성 호족 왕륭의 뒷배를 충분히 활용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을 담는 그릇들은 앞서 말한 다섯 가지 특성으로 우리를 감싼다. 그 기운들은 나에게 길함과 흉함으로 다가와 손짓하고 그 영향하에 우리를 가둔다. 집을 소우주라 말하는 것은 천명도 숙명도 아닌 노력에 의해 변하는 운명의 바뀜을 뜻한다.
강해연 < KNL디자인그룹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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