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은 신뢰가 생명
직원이 미군 파카 몰래 빼돌려
3만달러 손해보고 납품기일 맞춰
베트남전이 성장 기회로
전쟁 중인 베트남 방문해 미군과 계약
5년간 1억5000만달러 외화벌이
[ 서욱진 기자 ] 1990년 3월 대한항공 실무진은 어렵사리 당시 소련 측과 교섭해 새로운 항공 노선에 합의했다. 소련 영공 통과로 서울~독일 프랑크푸르트 노선은 운항시간이 17시간에서 12시간으로 5시간 단축되고, 운항거리도 1만3500여㎞에서 8550여㎞로 크게 줄어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故) 조중훈 회장은 웬일인지 차일피일 사인을 미뤘다. ‘대한항공의 사활’을 걸고 20여년간 노선 개척에 앞장선 조 회장의 이런 태도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 회장은 임원 회의를 소집해 “소련이 우리 민간기를 격추하고도 사과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이익을 좇는 기업이라지만 선뜻 합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 측으로부터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에 대해 비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낸 뒤에야 서명했다.
●트럭 한 대로 시작한 ‘수송보국’의 꿈
한진그룹은 1945년 11월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의미를 담아 창업한 한진상사를 모태로 한다. 그해 8월15일 광복과 함께 인천항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들어온 운동화, 양복, 밀가루 등 생필품이 넘쳐났다. 조 회장은 그해 11월1일 광복 전 운영하던 자동차수리업체를 정리한 돈으로 트럭 한 대를 장만했다. 이 트럭을 기반으로 인천항 부근인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한진상사는 6·25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차량과 장비들은 군수물자로 동원돼 흩어졌다. 조 회장은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피란 때 몰고 갔던 트럭 한 대로 밤낮없이 재건에 몰두했다. 마침내 주한미군 사업을 따내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미군 사업 수주는 신용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한진상사에는 1956년 큰 사고가 한 건 터졌다. 미군 겨울 파카 1300여벌을 수송하던 트럭 운전기사가 남대문시장에 파카를 모두 팔아넘긴 것. 조 회장은 즉시 직원들을 보내 도난당한 파카를 비싼 가격을 주고서라도 모두 사들이게 했다.
그는 평소 “사업은 지고도 이기는 것이고,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다”는 말을 즐겨 썼다. 당시로는 3만달러라는 큰 손실을 봤지만 납품은 제대로 끝낼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군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총탄 무릅쓴 베트남전을 기회로
1950년대 말께 한진상사는 가용 차량이 500대에 이르는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1959년 당시 ‘대한민국 경제 1번지’라고 불리던 서울 소공동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에 사무실도 마련했다.
조 회장은 1960년 8월15일 ‘수송보국(輸送報國)’의 꿈을 하늘에서도 펼쳐보겠다고 결심하고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주식회사 한국항공’ 설립 신고서를 냈다. 그러나 한국항공은 국내선만 취항했기 때문에 경쟁력이 약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항공사업 꿈을 접은 조 회장은 1961년 8월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다. 한진고속의 출발이었다.
한진그룹은 베트남전쟁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조 회장은 1965년 12월 경제시찰단으로 베트남 퀴논항을 찾았을 때 하역 순서를 기다리는 30여척의 화물선을 보면서 “우리가 수송을 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조 회장은 미국 펜타곤(국방부)을 방문하고, 미군을 끈질기게 설득해 1966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790만달러어치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맺었다. 그 뒤 1971년까지 5년간 벌어들인 외화는 총 1억5000만달러에 달했다.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이 125~200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수송, 한길만 가다
한진그룹은 1967년 7월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세우고, 그해 9월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1968년 2월 한국공항, 8월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9월엔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까지 인수했다.
이듬해인 1969년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하게 되는 대한항공공사(현 대한항공)를 인수했다. 대한항공 인수에는 큰 결단이 필요했다. 조 회장은 생전에 “대한항공은 부실투성이였고 미래도 불투명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타이항공 등 경쟁국 11개국 항공사 중 꼴찌를 달리던 부실 덩어리 항공사가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회사 임원들도 “총탄을 무릅쓰고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전부 밑빠진 독에 쏟아붓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정부는 조 회장이 한국항공을 설립한 경험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고, 조 회장은 몇 번의 고사 끝에 인수를 결정했다.
조 회장은 1977년 5월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세웠다. 1987년 11월엔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인수해 한진해운과 합병했다. 대한선주의 채무까지 떠안은 한진해운은 인수 2년 만인 1989년 126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조 회장이 작고한 2002년부터 한진그룹을 이끌고 있는 조양호 회장은 글로벌 경기 침체 등의 시련을 극복하면서 창업주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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