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 정부 각 부처 중 가장 바쁜 곳이 예산실이다. 다음해 예산편성이 늘 이때 마무리된다. 400조원에 육박할 2016년 나라 살림 수입·지출의 항목별 내역 구성에다 급증하는 재정적자를 메꿀 국채발행안까지 담는 방대한 작업이 끝나 갈 시점이다. 9월 초 국무회의 의결안으로 올리자면 점검·확인 사항도 많을 것이다. 부처마다 사활을 건 프로젝트도 있고, 공약이어서 물러서지 못한다는 사업도 적지 않다. 이미 100조원을 넘어선 거대 복지예산, 노동 개혁 유도 예산, 경기활성화 지원 예산…. 각 부처와 산하기관, 각급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로 올해도 예산실 문턱은 꽤나 닳을 것이다.
4개 국(局), 19개 과(課)의 160여명 예산실 직원들만 애쓰니 격려하자는 게 아니다. 정부예산을 책임지는 예산실의 이런 1년 농사가 올해도 국회로 가는 순간 갈가리 찢길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내년도 예산편성에는 단지 2016년도 것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정부의 수입과 지출은 중기·장기 재정계획에 연계돼 움직인다. 이 틀이 늘 국회에서 뒤흔들린다.
‘정부=편성, 국회=심의’ 헌법 위반
돈줄을 잡고 있기에 예산 퓽?막말로 정부 안에서도 완전 갑이다. 자부심을 넘어 배타심도 드러내는 게 이 부서 전통이다. 같은 공무원이라도 ‘업자들’이라며 예산철엔 쉽게 만나주지도 않는다. 그런 ‘특갑’의 예산실도 국회에 가면 허리가 굽혀진다. 대한민국 국회가 그런 데다.
예산실의 1년짜리 업무가 국회에서 무장해제 당하는 것은 이제 관행으로 굳어졌다. 예산실도, 기획재정부도, 아니 정부 전체가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인다. 사실은 국회와 정부의 위헌적·비정상적 국정운영이다. 헌법 제54조는 ‘국회는 국가의 예산안을 심의·확정한다’고 할 뿐 편성권이 정부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57조에는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도 돼 있다. 국회가 깎고 끼워 넣고 추가하는 것은 헌법에 정해진 예산처리시한을 안 지키는 악습보다 더 나쁘다.
국회 전횡, 굴복한 예산실도 책임
‘쪽지예산’ ‘민원예산’ 하는 국회의 예산 습격은 매년 당당하게 반복된다. 선수(選數)와 당직에 따라 챙기는 데 서열도 있다. 여기에 맞춰 예산실은 미리 조 단위를 국회용으로 요량해둔다. 이런 대비를 잘하고 여의도 실세들의 지역구사업·관심사업 챙기기에 잘 대응하는 것도 예산실의 덕목이다. 국회의 전횡과 예산실의 순응이 맞물려 예산 편성권까지 여의도가 장악해버린 것이다. 당사자는 감히 국회에 따질 용기가 없고, 누구도 지적을 하지 않으니 국회의 무혈쟁취다. ‘심의’와 ‘편성’조차 구별 못할 국회는 아니겠지만 누가 통제하나. 결국 눈치 빠른 공무원들은 예산실을 건너뛰고 바로 국회에 예산을 타러 갈 지경이 됐다. 장기 비전의 균형 재정은 더 멀어진다.
최근 추경예산에서 야당이 직접 편성하겠다고 나선 어처구니없는 일도 여기서 비롯됐다. 이러니 지방의회까지 예산을 짜겠다고 한다. 오세훈 사퇴로 이어졌던 4년 전 서울시의회의 무상급식 강행 파동이 그러했다. 지자체장에게 예산편성권을 보장한 지방자치법 위반이 서울만의 일도 아니다. 국회의 무소불위 월권이 근본 문제지만 예산실 책임도 적지 않다. 쉽게 굴복했고, 바로잡을 용기도 내지 못했다. 예산편성권 관련 세미나나 연다고 면책될까. 당장 올 정기국회 때부터 정상화에 나서야 한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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