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꿈속에서 도원을 노닐다
(25) 15세기 조선의 얼굴, 분청사기
(27) 이순신, 일본군의 기세를 꺾다
(28) 광해군의 두 얼굴
(29)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언듯 보면 맞배지붕의 정면 세 칸 한옥 건물인데, 자세히 보니 맨 끝 한 칸만 방이고 나머지는 정자처럼 텅 빈 마루입니다. 참 독특하면서도 운치있다 싶었는데 그 이름도 한 눈에 들어옵니다. ‘지락재(至樂齋)’, 즉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는 방랍니다. 이곳에서 누리는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 즉 성리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즐거움이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것이지요. 16세기 조선, 이제 선비들은 지방 사립대라고 할 수 있는 서원을 세우고 성현에 대한 제사와 성리학을 배우며 이를 통해 세상을 바꿔보려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


이후 서원은 계속해서 생기게 됩니다. 특히 향촌에서 성리학을 가르치며 이를 향촌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노력하였던 사림파들이 이곳에서 뭉치며 그 지역 사회를 성리학적 예법으로 교화시키려 하였지요.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풀뿌리 민주주의, 즉 지방자치제를 당시엔 지배층이었던 양반이 서원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향촌 자치를 시도한 것이지요. 물론 서원만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서원은 성현에 대한 제사와 학문 연구를 주로 담당하는 곳이니까요. 아, 이곳엔 기숙사도 있어 소수서원처럼 그 안에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라는 선비들의 숙박 공간을 두기도 했습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강조했던 향약

조선 중기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파에 대항하여 성리학적 도덕정치를 주장하였던 사림파는 한때 조광조처럼 사화로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결국 중앙 정계는 물론 지방까지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시켜 나갑니다. 특히 16세기 후반부터 사족들이 주도한 향약은 기존 전통적인 미풍양속과 자연스럽게 결합하면서 조선을 성리학적 유교 사회로 재편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퇴계 이황은 향약을 어기는 사람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백성이라고 규정할 정도였지요. 실제 그는 ‘예안향약’을 시행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가족의 도리를 어지럽힌 사람은 벌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율곡 이이는 오늘날 청주 지역에서 ‘서원향약’을 시행하면서 평민들도 쉽게 지킬 수 있도록 선악의 두 가지 내용을 명확하게 나누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며 친구 간에 화목하고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곧 선행입니다. 반대의 행위는 당연히 악행이지요. 이렇게 누구나 수긍할 수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유교적 덕목, 즉 삼강오륜의 내용이 결합되도록 유도함으로써 유교 윤리가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한 것입니다.
성리학의 확산을 가져온 서원과 향약

물론 한계나 폐단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림 세력이 향약을 통해 향촌에서 재판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생기며 국가 권력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서원은 17세기 이후 붕당 정치가 극단으로 치달으며 파벌 정치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원과 향약이 있었기에 조선은 지속적인 유교 정치와 함께 성리학적 규범을 바탕으로 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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