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와 임금체계개편은 얼마나 같고 다른가
노사합의가 남북합의나 한중 정상회담처럼 이렇게 모호해서야"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정규재 주 필 jkj@hankyung.com
우리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진리성에 근무한다. 매일 낡은 잡지를 재편집해 새로 찍어낸다. 예를 들어 지난달 잡지에 ‘초콜릿 생산량 1% 증가’였던 기사는 이번 달의 새로운 통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5% 증가’로 수정된다. 물론 낡은 잡지는 전량 회수되고 ‘새로 발행된 과월호 잡지’로 교체된다. 프라우다는 옛 소련의 국영 신문으로 ‘진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프라우다에는 프라우다가 없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옛 소련을 닮은 소설 1984의 오세아니아에서는 복잡한 단어는 국민들을 반항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새로운 단어들로 재편집됐다. 신어(newspeak)는 사상을 배제한 언어였다. 이를 테면 좋다는 의미인 good의 반대어는 bad가 아니라 ungood이다. good의 비교급은 better가 아닌 gooder, best는 goodest다. 그런 원리로 great는 plusgood이 되고, excellent는 doubleplusgood이 된다. 언어는 그렇게 비틀어졌다.
언어는 언제나 정치 현실을 반영한다. 이런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그러나 낯선 일이다. 최근의 경험도 그렇다. 북한이 사과한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당혹스런 것은 보통의 한국인이었다. 북한이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문장의 액면으로는 사실이었다. ‘서부전선에서 지뢰사고가 있었고, 병사들이 다쳐서 유감’이라는 언어였을 뿐이다. 한국 정부는 ‘사고 아닌 도발’이었고 ‘유감 아닌 사과’라고 우겼다. 문장의 랑그(langue)가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파롤(parole)은 분명히 ‘유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도 언어의 전도 현상은 되풀이됐다. 중국이 거듭 한반도 핵이라고 말하는 것을 한국은 북한 핵이라고 설명했다. ‘한반도 긴장 조성에 반대’라고 한 부분을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혹시 미국의 사드 배치를 말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자주적 통일이라는 조항도, 중국 측은 미국을 배제한 통일로 읽었을 가능성이 많다. 통일외교라는 단어에 이르면 더욱 다양한 혼란이 존재하고 있다. 정치는 그렇게 명징한 언어를 기피한다.
엊그제 노·사·정 합의도 현기증의 되풀이였다. ‘합의하기로 합의한 합의’를 놓고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이나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참 고약한 일이 되고 말았다. 누가 언어를 교란시키는지 알 수 없다. 해고조건 완화도 취업규칙 개정에 대해서도 장차 노사 간 협의를 갖기로 합의했을 뿐이다. 아니 이것을 합의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럼 지금까지는 무엇을 토론하고 협 피杉募?것인지. 그렇게 구체적 합의는 실종되고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장 확실한 것은 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개혁은 그렇게 확실하게 봉쇄되었다. 노조와의 합의를 모든 노동개혁의 조건으로 선언한 것을 정부는 지금 노·사·정 합의라고 부르고 있다. 어제 어떤 노조원이 분신을 시도했다지만 필시 합의문 내용을 자세히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고라는 말도 사라졌다. 공정한 평가체계를 구축하고 근로계약 체결 및 해지의 기준과 절차를 법과 관례에 따라 명확하게 할 예정이라는 것이 합의문이다. 그것도 노사와 충분한 협의라는 조건부였다. 임금체계 개편도 장차 요건과 절차를 명확하게 정하기로 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 조항 역시 노사 간 충분한 협의를 거쳐야 하는 조건부다. 그리고 조항마다 노조를 거치도록 함으로써 노조는 이번에도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노조법은 이번에도 신성불가침이었다.
해고요건이나 임금피크제를 노조가 의제로 받아준 것만 해도 어디냐고? 글쎄다. 노조 측에 해당하는 조항에는 해고나 임금피크제라는 단어가 없다. 임금피크제라는 단어는 이를 통해 절감된 만큼 신규 채용에 쓴다는 등의 기업 측 해당 부분에만 등장하는 단어다. 사용자에게는 임금피크제요, 근로자에게는 임금체계 개편이다. 북한과의 합의처럼 그렇게 노사가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다. 1984에 옮겨와 사는 듯한 언어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누가 한국어를 이토록 모호한 언어로 만들고 있나.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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