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지음 /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173쪽 / 1만4000원
[ 송태형 기자 ] 유럽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태생의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는 1939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시학 강좌 연단에 섰다. T S 엘리엇 등이 연사로 섰던 ‘찰스 엘리엇 노튼 시학 강좌’에 음악가로는 최초로 강연에 나선 것이다. 연주회 단상이 아니라 강단에서 청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그의 나이 57세. 청년기인 1910년대 발레곡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사진)’ 등으로 파리 예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는 이후에도 ‘시편 교향곡’ 등 걸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20세기가 낳은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로 불리던 때였다. 미국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예술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든 그의 강연에 주목했다. 스트라빈스키는 공들여 준비한 여섯 차례의 강연을 통해 음악 예술의 의미와 창작 행위의 본질, 전통과 혁신의 관계 등에 대한 통찰과 신념을 풀어놓았다. 강연은 “처음으로 한 음악가가 시학에 대해 철학자와 문인들에게 뒤지지 않을 조예와 위엄을 보여줬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의 하버드대 강연 내용을 담은 책이 국내 처음으로 번역·출간됐다. 민음사가 새 인문시리즈 ‘생각’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 펴낸 《음악의 시학》이다. 하버드대출판부가 1942년 출간한 책이다.
‘불새’ ‘봄의 제전’의 파격적인 음악만 듣고 스트라빈스키를 혁신의 대명사, 전위적인 모더니스트쯤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은 책 내용에 허가 찔리는 느낌이 들 법하다. 그는 예술과 창작에서 질서와 규율을 강조하고 전통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스트라빈스키는 “진정한 전통은 지나가 버린 과거의 증언이 아니라 현재에 활력을 불어넣고 정보를 주는 살아 있는 힘”이라며 “전통은 창조의 연속성을 보장해 준다”고 말한다. 혁신은 전통과 함께 갈 때에만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차르트와 하이든을 예로 든다. “전통 위에 자신만의 독창성으로 기적을 이룸으로써 또 다른 전통을 일궈 낸 거장들”이라고 평한다.
창의적 상상이 헛된 공상이나 과장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규율과 전통이 필요하다는 지론을 반복적으로 펼친다. “창작인의 역할은 그가 받아들인 요소들을 체로 거르는 것”이라며 “예술은 통제되고 제한되고 수고가 가해질수록 더욱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창조 능력은 늘 관찰의 재능과 함께한다”는 설명도 흥미롭다. “진정한 창작인들은 늘 자기 주변에서, 가장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요소들을 발견합니다.”
그의 예술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다양성의 조화를 통해 일체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적이고 사변적이면서도 때로는 신랄한 어조로 풀어놓는 그의 신념과 통찰은 동의 여부를 떠나 ‘창조적 상상’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곱씹어볼 만하다.
민음사는 이 책과 함께 ‘생각’ 총서 1차분으로 《설득의 정치》(키케로 지음, 김남우 등 옮김),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페리클레스 등 지음, 김헌 옮김), 《불온한 철학사전》(볼테르 지음, 사이에 옮김)을 내놨다. 페리클레스 연설 등 일부 내용을 제외하고 모두 국내 초역이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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