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마다 한번씩 하는 과표구간 조정
납세자 세금 줄어들었다 착각하게 해
실질물가연동제로 재정 설계 보완
조세저항 등 증세 부작용 줄여야
1년은 열두 달이지만 ‘유리지갑’들에게는 ‘13번째 달’이 있다. 예년에는 원천징수된 세금을 정산(精算)해 많이 낸 만큼 되돌려 받았기 때문에 ‘13월의 보너스’의 즐거움을 줬다. 올해는 ‘13월의 울화통’이 될 것이라고 해 ‘연말재정산’에다 ‘소급적용’까지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이번 연말정산 파동의 진실은 무엇일까. 월급쟁이나 야권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꼼수 증세’일까. 정부의 항변대로 증세가 아니라 제도 변경으로 인한 일종의 ‘착시 현상’일 뿐일까. 공공선택학의 시각에서 보면 ‘제도설계 변경에서 비롯된 감춰진 증세’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세율을 올리지 않고도 증세할 방법이 있다. 과세표준 구간 조정이란 마법이 그것이다. 이른바 ‘재정견인(財政牽引·fiscal drag)’을 통한 ‘보이지 않는’ 증세인 것이다.
자동차 사고가 나면 견인차가 득달같이 달려와 부서진 자동차를 끌고 간다. 세금과 관련해서도 정부는 소리 없이 납세자를 ‘견인’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세율을 올리지 않고 납세자들을 더 높은 세율 적용 구간으로 견인해 세수를 늘리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
소득세의 경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지난 30여년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각국의 세원 확대와 법정세율 인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소득세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 세율을 올리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세수가 증가했을까. 그 이면에는 재정견인 수법이 숨어 있다.
재정견인은 소득세율 인상 없이도 근로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수단이다. 더 많은 납세자를 상위 과세 구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재정견인의 마법은 소득세 공제와 면세점이 물가 상승률이나 소득 증가율과 똑같은 크기로 조정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특히 소득은 물가 수준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소득공제와 면세점이 물가 수준만큼 높아진다면 더 많은 사람이 세금을 내게 되고(전체 납세자 증가), 이들 중 많은 사람은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게(고액 납세자 증가)되는 것이다.
지난해 1월1일 새벽 국회는 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세법 개정안은 6~38%의 세율은 그대로 둔 채 소득세 과표구간만 조정했다. 즉 35% 세율을 적용받는 소득구간을 8800만~3억원에서 8800만~1억5000만원으로 좁히고, 38% 세율을 적용받는 소득구간은 1억5000만원 이상으로 넓혔다. 그 결과 최고 세율 적용 소득자 수가 4만1000명에서 13만2000명으로 세 배 이상으로 늘었고, 이로 인해 소득세 세수가 크게 증가한 것이다. 과거 2억원을 버는 소득자는 35%의 세율로 7000만원의 소득세를 냈으나 이제는 38%의 세율을 적용받아 7600만원의 세금을 내게 된다. 일종의 ‘부자증세’인 이 마법이 재정견인이다.
재정견인을 통한 세수 증가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근로자 A의 소득은 연 2000만원이다. 근로소득세 면세점은 연 500만원이며, 500만~2500만원 구간 소득세율은 20%다. 이 경우 A는 연 300만원((2000만원-500만원)×0.2)의 세금을 낸다. 이는 소득의 15%에 해당한다. 이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A의 소득이 5% 늘어 2100만원이 됐고, 정부는 소득세 면세점을 2% 올려 510만원이 됐다고 가정하자. 이때 A의 소득세는 318만원((2100만원-510만원)×0.2)으로 증가한다. 소득의 15.14%다. 세율은 그대로인데 소득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5%에서 15.14%로 커진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재정견인은 단순히 ‘고액 납세자 수 증가’를 나타낸다. 소득세에서 면세점은 세율만큼 중요하다. 선진국은 세율 변경보다 소득세 납부자 수와 고액 납세자 수를 더 중시한다. 소득세 납부자 수와 고액 납세자 수는 경제 성장에 의한 소득 증가가 아니라 재정견인으로 늘릴 수 있다. 한국뿐 아니라 선진국의 소득세 면세점은 매년 인플레이션율과 나란히 인상되지만, 소득이 인플레이션율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면세점을 초과하는 납세자 수가 증가하며, 일부 납세자는 상위 납세 구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재정견인은 조세 부담을 키우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일부 OECD 국가는 재정견인에 의한 조세 부담 증가를 완화하기 위해 ‘인플레이션 조정’이나 ‘물가연동제’를 도입하고 있다. 벨기에 네덜란드 캐나다 영국 미국 등은 인플레이션율 자동 조정을 통해 재정견인 효과를 부분적으로 상쇄하고 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인플레이션율뿐만 아니라 실질소득 증가율도 조정한다. 한국은 아직 인플레이션이나 실질소득 증가에 따른 재정견인을 상쇄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재정견인을 근원적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실질 물가연동제’를 도입해야 한다. 소득공제와 면세점을 인플레이션율만이 아니라 물가 수준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는 경향이 있는 소득 증가율에 맞춰 조정해야 한다. 또 정부는 조세정책을 투명하게 운용하고, 재정견인에 대해서도 국회 동의를 얻도록 해야 한다. 재정견인은 정부가 납세자 몰래 세수를 조달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과표구간을 물가 수준에 연동시킴으로써 재정견인을 부분 상쇄할 수 있지만 문제는 정부가 그런 작업을 매년 하지 않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수년에 한 번 한다는 점이다. 납세자들이 재정견인의 효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부는 몇 년에 한 번 과표구간을 조정하고 생색내기에 열을 올린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과표구간이 조정되면 납세자들은 실질 세율이 인플레이션 발생 이전 수준으로 ‘낮아졌다’고 느낀다. 이는 정부가 납세자들에게 ‘세율을 인하했다’는 인상을 주거나 추가 혜택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정부가 납세자의 이런 ‘착각’을 놓칠 리 만무하다. 정부가 과표구간을 주로 선거 직전에 조정해 발표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재정학자들은 세제 개혁의 금과옥조로 ‘낮은 세율, 넓은 세원’을 제안한다. 그러나 세수 증대가 필요한 정부는 세목 신설이나 세율 인상보다는 재정견인이란 손쉬운 수단을 이용하려 한다. 전체 납세자 수와 고액 납세자 수의 증가는 세율 인상 없이도 세수를 확실히 증가시킬 수 있다. 따라서 재정견인은 세율 인상과 똑같은 기능을 발휘한다. 정부가 납세자들의 무지에 의거해 재정견인을 모른 척하고 그저 묵인하는 것만으로도 증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꼼수 증세가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정부는 소득구간에 물가연동제를 도입하는 등 납세자가 원하지 않는 과표 구간으로 견인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납세자들은 조세저항이나 소비 축소를 통해 보복하려 들 것이다. 특히 이번 연말정산 사태는 조세제도와 관련해 설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이성규 < 안동대 무역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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