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Industry] 소리는 작게, 날은 더 강하게…'주방 필수품' 믹서기의 진화

입력 2015-10-13 07:02   수정 2015-10-16 14:58

산업 리포트

과일주스 만드는 용도 1980년대 유행
녹즙기 '쇳가루 파동' 후 원액기 등장
소음·영양손실 줄인 블렌더 신흥강자로



[ 안재광 기자 ]
집 안 부엌에 믹서기를 들여놓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다. 과일을 갈아 주스를 만드는 사람이 많았다. 콩을 갈아 두부를 쑤는 맷돌을 대신하기도 했다. 믹서기 소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처럼 컸지만 주부들은 이 혁신적 전자제품의 성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믹서기는 시간이 지나며 녹즙기, 원액기로 진화했다. 이 진화가 최근 다다른 곳은 블렌더다. 강력한 모터 힘으로 단단한 재료까지 분쇄하는 블렌더가 원액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외국계 기업과 국내 중소·중견기업이 블렌더라는 새로운 시장을 놓고 본격적인 경쟁에 들어갔다.

원액기가 시장 장악

믹서기는 1980년대 후반까지 ‘만능 믹서기’란 이름으로 팔렸다. 과거 절구와 맷돌 기능을 모두 대체한다고 해서 ‘만능’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찧거나 빻고 싶은 음식 재료가 있으면 믹서기에 맡겼다. 그만큼 주부들이 갖고 싶은 주방가전 제품이었? 옛 금성사(LG전자)나 삼성전자 같은 국내 대기업 제품과 일본, 미국에서 수입한 제품이 주류를 이뤘다.

믹서기는 1990년대 초반 녹즙기에 주도권을 넘겨줬다. 채소와 과일 등을 짜 즙으로 만들어주는 녹즙기는 큰 인기를 끌었다. 믹서기를 쓸 때보다 마시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높아진 건강에 대한 관심은 녹즙기 판매량을 급속히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한 소비자단체와 민간연구소가 공동으로 녹즙기에서 다량의 중금속이 나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1994년에 불거진 이른바 ‘쇳가루 파동’이다. ‘쇠끼리 부딪치면서 쇳가루가 나온다’고 알려지자 40여개에 달했던 녹즙기 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그 이후 중소기업들은 믹서기, 녹즙기의 계보를 잇겠다며 다양한 상품을 내놨지만 이렇다 할 스타 제품은 없었다.

2008년께 원액기가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녹즙기를 만들던 휴롬의 김영기 회장의 작품이었다. 재료를 지그시 눌러 짜는 ‘저속 착즙 방식’으로 영양소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는 점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모터가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재료에 있는 영양분을 파괴하는 믹서기와 달리 원액기는 천천히 돌면서 영양분을 온전히 보존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믹서기로 만든 주스보다 목넘김이 좋다는 장점도 부각됐다. 휴롬은 지난해 매출 3000억원을 달성하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최근 이 시장에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났다. 블렌더다. 블렌더는 기존 믹서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용기에 재搔?넣으면 칼날이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재료를 갈아낸다. 믹서기에 비해 모터 성능을 높여 훨씬 더 강한 힘을 내는 게 장점이다. 사과나 얼음을 통째로 분쇄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부 제품은 공기를 차단해 영양소가 파괴될 가능성을 줄였다. 기존 믹서기의 단점을 개선한 제품인 셈이다.

블렌더 시장 급성장에 업체 난립

국내 블렌더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지만 급성장하고 있다. 업계는 작년 국내 블렌더 시장 규모가 1300억원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깨비 방망이’로 불리는 핸드 블렌더까지 합하면 1700억원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은 크지 않지만 성장률은 매년 40~50%에 달한다.

업체들이 앞다퉈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외국계 기업 중에선 필립스 테팔 브레빌 일렉트로룩스 등이 일찍부터 시장을 공략 중이다. ‘토종 기업’인 리큅 해피콜 한경희생활과학 등도 제품을 내놨다. 최근에는 가구업계 국내 1위 한샘까지 가세했다. 이 밖에 수많은 중소기업이 블렌더 시장에 뛰어들었다. 뚜렷한 강자가 없기 때문에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국내 기업 가운데 블렌더 사업에 가장 적극적인 곳 중 하나인 리큅은 “원액기보다 영양소 손실이 적고 식이섬유를 함께 섭취할 수 있어 건강주스를 만드는 데 블렌더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원액기 사용자를 블렌더 쪽으로 흡수하기 위한 전략을 쓰고 있다.

원액기 시장을 장악한 휴롬이나 엔유씨전자도 블렌더를 내놨다. 다만 기존 원액기 시장을 스스로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소 다른 방식을 택했다. 음식 재료를 빻거나 찧는 용도의 핸드 블렌더 쪽에 더 치중하고 있다. 휴롬 관계자는 “채소, 과일 주스는 원액기로 만드는 게 건강에 가장 가장 좋다”며 “블렌더는 밀가루 반죽이나 멸치를 갈 때 등 음식 재료 준비를 위한 용도로 내놨다”고 설명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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