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끌어 나갈 지도자의 식견
이들 덕목 닦을 수 있는 교육이어야
이제민 < 연세대 경제학 명예교수 leejm@yonsei.ac.kr >
국사 교과서 국정화(國定化)를 둘러싸고 논란이 심하다. 자기 나라 역사를 제대로 배우자는 데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겠지만, 그 방법에 대해 합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필자 생각에는 국사보다 오히려 세계사가 더 문제인 것 같다. 세계사가 고등학교 과정에서 선택과목으로 바뀐 때문인지, 지난 10여년간 마그나카르타, 명예혁명, 심지어 프랑스대혁명 같은 사건도 모르는 대학 신입생이 부쩍 늘었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국사 교과서 논란의 핵심이 학생들에게 세상에 대한 ‘균형 있는 관점’을 갖게 해 주는 것이라면, 그런 점에서 세계사 지식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역사만이 아니고 교육 전반에 관한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민주국가 시민의 기본 소양과 사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의 식견을 어떻게 갖추게 하는가의 문제다.
한국은 이 문제에 대해 혼선을 거듭해 왔다. 그것은 1차적으로 중·고교 때의 학습 부담 때문이다. 세계사 같은 과목이 선택으로 바뀐 것은 학습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였다. 한국 중·고교에서의 학습 부담은 대학 입시에 따른 것이 대부분이다. 학력이 신분처럼 돼 있는 사회구조, 대학의 단순 서열화, 직업훈련 기회는 적고 대학 진학률은 과도하게 높은 현상이 살인적인 학습 부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은 그런 ‘상류’ 쪽의 구조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면서 ‘하류’ 쪽에서 입시 방법을 바꾸거나 중·고교 교과과정을 조정하는 대증요법으로 일관해 왔다.
혼선을 거듭한 데는 더 근본적 원인도 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처음 일제강점기에 물려받은 유산의 영향이 컸다. 그것은 중·고교에서 상당한 기초학문 교육을 받은 뒤 대학에서 전공교육을 받는 시스템이다. 대학 전공에는 문·사·철(문학·역사·철학), 수·물·화(수학·물리·화학), 정치·경제 같은 기초학문과 ‘돈 되는 학문(bread science)’인 법학·의학·경영학 등이 같이 있는 구도다. 반면 미국 교육 시스템은 중·고교까지는 최소 한도의 교양 교육을 받은 뒤 대학 4년 동안 기초과목을 통해 세계를 보는 법과 지도자로서의 식견을 익힌 다음 법학·의학·경영학 등 돈 되는 학문은 대학원에서 공부하게 돼 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 교육은 일본 시스템과 미국 시스템 사이를 오락가락해 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를 보더라도 미국 시스템을 도입한다면서 대학 신입생을 계열별로 뽑은 뒤 전공을 택하게 했다. 거기에는 미국식으로 법학·의학·경영학 등을 대학원으로 보낸다는 전제가 있었지만 실행은 되지 않았다. 그 결과 기초학문이 초토화됐다. 기초학문 중에서 비교적 인기가 있는 경제학 같은 학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 대학이 다시 과별 모집이 허용되는 식으로 돌아왔는데, 이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필자가 보기에 미국 시스템과 일본 시스템이 다른 큰 원인은 경제적 여건 차이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세계 최고 부자나라로서 지식의 생산에서도 ‘우회생산’을 할 여유가 있는 반면 일본은 가난한 후발국으로서 콤팩트하게 배워서 빨리 선진국을 따라잡고자 했다. 한국은 지난 50여년간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국 같은 나라에 비할 바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혼선에 따른 비용은 엄청났다. ‘문·사·철’ 같은 기초학문은 취업 조건 등 때문에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옳았는가. 경제학 같은 학문도 그때의 타격에서 다 회복됐는지 의문인 데다, 그런 혼선의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대학에서 ‘세계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경제사 같은 과목이 필수과목에서 빠지게 됐다.
지금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중·고교와 대학 모두에서 민주국가 시민의 기본 소양과 사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의 식견을 제대로 닦게 할 수 있는지가 몹시 의문시되는 시스템이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제민 < 연세대 경제학 명예교수 leejm@yonsei.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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