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락까

입력 2015-11-17 18:03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싹튼 유프라테스 강변의 유서 깊은 도시 락까(Raqqah). 이곳은 교통과 군사 요충지여서 기원전 200여년부터 번창했다. 역사가 오랜 만큼 도시의 부침도 심했다. 로마 후기에는 그리스도교도들이 살았다. 639년 무슬림에 정복된 뒤로는 동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이슬람 군사도시로 바뀌었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폐허가 됐고 16세기에는 오스만제국에 복속됐다. 1차대전 후엔 프랑스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6년 시리아가 독립한 이후엔 면화 교역으로 옛 명성을 조금씩 회복했다. 1968년 유프라테스강에 타바카댐이 생기면서 상업도시의 면모를 갖췄다. 중동전쟁이나 인접국과의 분쟁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근처에서 석유도 났다. 자연히 사람과 돈이 모였고 인구 20여만명의 시리아 6대 도시로 성장했다.

이곳에 비극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워진 것은 얄궂게도 2011년 ‘아랍의 봄’ 때였다. 시위는 내전으로 번졌고 정부군과 반군의 혼전이 이어졌다. 그 사이에 무주공산이 된 이곳은 결국 ‘이슬람국가(IS)’ 세력에 점령돼 버렸다. IS는 이곳을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의 수도로 삼았다. 이들은 전쟁에 지친 주민들에게 빵과 약품을 나눠주며 마음을 얻더니 이내 폭압통치의 본성을 드러냈다.

각국 민간단체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락까를 중심으로 시리아에서 살해된 사람은 2600여명에 이른다. 자고나면 투석형과 손목절단형, 참수형이 잇따랐다. IS는 ‘무슬림이 아닌 자를 죽일 수 있다’,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의 목을 벨 수 있다’는 등 코란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만행을 일삼았다. 자살테러를 순교라고 부추기며 젊은이들에게 폭탄조끼를 입혀 내보냈다. 지금도 락까 시내의 ‘천국광장’에서는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 등으로 참수형과 십자가형이 자행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천국광장을 지옥광장이라고 부른다.

엊그제 13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파리 연쇄 테러도 이곳에서 기획되고 훈련받은 범인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격분한 프랑스는 최신 전투기를 동원해 IS 거점에 최대 규모의 폭격을 퍼부었다. 유럽 최대 핵 항공모함인 샤를드골 전단까지 동원할 모양이다. 그렇잖아도 항공기 테러를 당한 러시아의 보복 공격으로 쑥대밭이 된 게 사흘 전이었다. 공습을 예상한 IS 수뇌부는 이미 피신했다. 이래저래 무고한 시민들만 포연 속에 떨고 있다. 2200여년 역사의 고대도시 락까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날은 언제일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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