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유언대용신탁, 부모가 치매 걸려도 해지 못해"

입력 2015-11-22 18:46  

유언대용신탁 첫 판결

"은행과 맺은 재산 신탁계약
생전 변경 가능한 유언과 달리 당사자가 일방적으로 못 바꿔"
상속 때 유언 대안으로 주목



[ 양병훈 기자 ] 유언대용신탁은 내용이 바뀌거나 무효가 되기 쉬운 유언과 달리 재산을 남기는 사람(피상속인)이 치매에 걸리거나 마음이 바뀌어도 애초에 맺은 계약 내용이 보호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2011년 신탁법 개정으로 도입된 유언대용신탁이 법원의 판결 대상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언대용신탁의 안전성을 두텁게 보호한 판결이어서 유언의 대안으로 떠오를지 주목된다.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민사2부(부장판사 박주현)는 전모씨가 “유언대용신탁 계약을 취소하고 재산을 돌려달라”며 하나은행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고 22일 밝혔다.

슬하에 딸을 넷 둔 노인 전씨는 지난해 8월 하나은행에 14억원의 재산을 맡기는 내용의 유언대용신탁을 들었다. 재산을 은행이 관리하되 전씨가 살아 있을 때는 이 재산에서 병원비 요양비 등을 지출하고 사망한 뒤에는 네 딸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눠주는 조건이었다. 전씨가 치매 증상이 있어 “사후수익자인 상속인 전원의 동의를 얻어야만 신탁계약을 해지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는 조건도 넣었다. 신탁계약을 맺은 지 5개월 뒤인 지난 1월 驩쓴?이를 무효화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전씨는 넷째 딸 송모씨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송씨를 제외한 가족들은 재판에서 “송씨가 어머니 전씨를 회유해 소송을 낸 것이고 소송의 실질적 당사자는 송씨”라며 “송씨가 전씨의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기 위해 신탁계약을 무효화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우증권 부사장을 지낸 A씨와 상공부 차관을 지낸 B씨도 이들 가족의 일원이다. 송씨는 “다른 가족들이 탐내는 어머니의 재산을 원래대로 어머니 앞으로 돌려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씨 측은 “이 신탁계약은 재산을 자신의 뜻대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해 헌법상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헌법상 기본권 규정은 민법을 거쳐 간접적으로 사법관계에 효력을 미치게 된다”며 “이 사건 신탁계약이 헌법상 재산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치매로 의사능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신탁계약을 맺었으므로 무효’라는 주장도 “계약 전에 이뤄진 인지기능검사 및 면담 결과에 따르면 당시 전씨는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능력에 큰 문제가 없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 하나은행을 대리한 김상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당사자가 계약을 맺을 당시 정한 계약 해지 요건을 법원이 그대로 받아들였다”며 “유언으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남기는 데 한계가 있지만 유언대용신탁은 융통성 있는 설계가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평가했다. 같은 로펌의 이응교 변호사는 “유언의 기능을 갖지만 법적으로는 신탁이기 때문에 계약 당시의 의사를 우선시한 것”이라며 “앞으로 발생할 비슷한 소송에서 선례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 유언대용신탁

유산을 남기는 사람이 “내가 죽은 뒤 미리 약속한 방법대로 재산을 처리하라”는 내용으로 금융회사와 맺는 계약이다. 법적으로 유언이 아닌 신탁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유언이 갖춰야 할 엄격한 요건을 피하면서 재산을 후대에 원하는 방식대로 물려줄 수 있다. 2011년 신탁법 개정으로 도입됐다. 국내 다수의 금융회사가 새로운 사업분야로 삼고 관련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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