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3·1 운동, 겨레의 독립 만세 운동

입력 2015-11-27 17:15  

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40·끝>

(35)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36)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다
(37) 제국을 선포하다
(38) 일제에 외교권을 뺏기다
(39) 진정한 동양 평화를 위하여




1919년 3월 13일, 미국 뉴욕타임즈 신문에는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 그리고 “수천 명의 운동 가담자들이 일본에 연행되다”라는 기사가 실립니다. 기사에는 이 운동이 예상보다 더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 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되었고 일본이 대규모 헌병대를 추가로 부를 것이다고 보도하였습니다. 또한 AP통신의 보도로,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천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쯤되면 여러분도 이 운동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겨레의 독립 만세 함성이 울려퍼진 바로 3·1 운동입니다.

1919년 뉴욕타임즈에 소개된 3·1 운동

3·1 운동이 발발한 직후 이를 소개한 신문은 더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은 한국琯湧?비무장(비폭력) 혁명을 일으켰다고 대서특필하였으며 프랑스의 앙탕트, 영국 모닝포스트는 물론 일본 반도신문과 조일신문 및 중국 민국일보에도 기사화하였지요. 이처럼 전세계 언론이 주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3·1 운동이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채택된 민족 자결주의와 같은 세계사적 흐름을 반영하였으며,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만세 운동을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1919년 4월 1일자 베이징대 학생들의 잡지 <<신조>>에는 3·1 운동에 대해 첫째, 무기를 갖지 않은 혁명, 둘째 불가능한 것을 알고 한 혁명, 셋째 순수한 학생혁명에서 출발한 점 등을 주목하며 '혁명계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심지어 인도의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다 이 3·1 운동에 대한 보도를 접하게 된 후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인도로 돌아와 영국에 대한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당시 일제는 3·1 운동을 조그마한 소요 사태로 치부하고 이를 감추려 급급하였지만 오히려 세계가 주목하는 민족 독립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3·1 운동은 어떤 계기와 과정을 거쳐 당시에 일어난 것일까요? 앞서 말했듯 국제적으로 민족 자결주의가 채택되고 있었지만 정작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핍박당하던 민족들이 앞장서 이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일제도 당시에는 영국, 미국 등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승전국이었으므로 3·1 운동을 펼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요. 그래서 더욱 지금까지도 세계사적으로 조명받는 운동이 된 것이기도 하구요.

대한독립선언과 2·8 독립 선언

저는 무엇보다 우리 민족 내부의 역량과 독립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3·1 운동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미 1917년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독립 운동에 대한 결의와 그 지향점으로 공화정체의 국가 수립을 천명한 ‘대동단결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8년에는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무장 투쟁을 선포하는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였지요. 1919년 초에는 일제의 심장부 도쿄 한복판에서 재일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일제에 저항하며 독립을 천명하려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장례식인 3월 3일에 사람들이 서울로 많이 모일 것을 예상하여 독립 만세 시위가 준비됩니다. 당시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그리고 불교계의 한용운 등 주로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하였지요. 그런데 고종 황제의 장례식, 즉 국장일 당일에 만세 시위를 하는 것은 예의상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 3월 2일로 날짜를 정합니다. 그러나 이날도 주일이라 결국 3월 1일로 결정됩니다.

3월1일 태화관에 집결한 민족 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만세 삼창을 합니다. 곧 조선 총독부에 체포되었지만 종?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시민과 학생들 4천여 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 손에는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특히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종각에서 경운궁(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남대문으로 나아갔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동참하게 됩니다. 곧 서울은 물론 지방과 농촌까지 확산되었으며 노동자, 농민 심지어 기생까지 참여하는 등 정말 다양한 계층이 모두 참여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계기가 된 3·1 운동

심지어 국외 동포들도 이 소식을 듣게 되어 3·1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서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 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지게 됩니다. 일제는 이러한 31 운동을 잔인하게 탄압하였으며 군대와 헌병 경찰들은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경기 화성 제암리에서 일제는 주민들을 학살하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지요.

한편, 3·1 운동은 5월말까지도 지속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성과를 계승하여 4월에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내에서도 13도 대표들이 비밀리에 모여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조직하게 됩니다. 1919년 9월, 여러 곳의 임시 정부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결실을 맺게 되어 국내외 임시 정부가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됩니다. 3·1운동이라는 겨레의 독립 맑?운동이 임시 정부 수립이라는 독립 운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성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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