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망우물(忘憂物)

입력 2015-12-24 18:25  

시름을 잊게 하는 물건
중고시장·5일장 자주 찾아
물건 사며 스트레스 풀어
'각자의 취미'를 찾았으면

최동규 < 특허청장 >



중국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의 ‘음주(飮酒)’ 제7수엔 ‘망우물(忘憂物)’이란 구절이 나온다. 직역하면 ‘시름을 잊게 하는 물건’이며, 이 시에선 술을 가리킨다. 훗날 망우물은 술을 비유하는 말로 널리 쓰였고, 나아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란 뜻까지 갖게 됐다.

필자의 망우물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마음이 철석같고 흐트러짐 없는 비범한 영웅들도 가끔은 우울하다고 한다. 필자와 같은 필부가 스트레스를 받아 풀 길이 없다면 어찌 쉽게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사실 취미야 많긴 하다. 스쿠버다이빙이나 골프, 컴퓨터 조립과 컴퓨터 게임 등. 하지만 이런 취미 중 망우물은 없다. 스쿠버다이빙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다 체력이 따라가지 못해 그만뒀다. 골프는 잘 못하니 망우물이 아닌 ‘망신물(亡身物)’이다. 컴퓨터 조립은 비용 면에서 ‘꽝’이다. 게임도 이른바 ‘끝판왕’에게 당하거나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지면 스트레스를 더 받는 경우가 많았다.

“열심히 일하는 게 취미고 시름을 잊게 한다”는 위인들의 말은 필자에겐 그저 이기적 농담으로 들릴 뿐이다. 독서나 TV 시청도 특별히 내세울 만큼 즐기는 편이 아니다.

필자의 망우물은 서울 용산 전자상가나 드물게는 황학동 벼룩시장 같은 중고시장, 그리고 지방 5일장에 다니는 것이다. 옷을 대충 입은 후 면도를 안 해도 의식할 사람 없고, 단돈 1000원 깎으려고 흥정을 해도 체면 상할 일 없어서 좋다.

필자의 아내는 이런 망우물에 질색을 한다. “새것을 사고, 안 사더라도 새 물건을 보는 게 좋은데 어째서 그런 물건에 관심이 많으냐”고 다그친다. 그래도 필자는 아내 몰래 시장으로 나선다. 비록 시장에서 사온 물건이 쉬이 고장 나 결국 새로 사야 해서 돈이 더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자주 시장으로 간다.

시장에서 나는 시름을 잊는다. 뭘 잘못 사도 새 물건을 잘못 샀을 때와 같은 스트레스는 없으니까. 한 주 동안의 치열한 삶이 주는 스트레스를 조금은 이완된 상태로 반나절 만에 풀 수 있으니 이만큼 좋은 망우물이 어디 있을까.

직업이나 경제력을 떠나 현대인들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의 망우물이 필요하다. “내겐 취미가 없다”고 눙치는 대신 자신에게 맞는 취미를 찾았으면 한다.

최동규 < 특허청장 dgchoi15@korea.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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