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승객 수송 '말로만' …숙소 수배도 '우왕좌왕'
공항공사, 밤샘난방 요구에 "비용은 누가 대나"
제주도민의 온정 빛나…도민·기업, 방 내주고 식사 제공
[ 고재연 / 김명상 기자 ] “5살짜리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 아빠는 버스에 타고 있어요. 저희 좀 먼저 태워주세요!”
32년 만의 폭설로 관광객 2만여명이 제주공항에 발이 묶였던 지난 23일 오후 7시쯤. 한 30대 여성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제주 시내로 나가는 200번 버스가 공항의 버스정류장에 들어오자 수백 명이 버스로 몰려들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기 때문. 길 건너 택시 정류장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줄이 늘어섰지만 택시는 한 대도 들어오지 않았다. 맨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던 이모씨(32)는 “30분 전에 택시가 한 대 온 뒤 감감무소식”이라며 연신 콜택시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량 폭증으로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전세버스운송조합과 일부 버스운송회사의 버스를 공항에 투입해 공항 체류객을 도심지로 수송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오후 7시가 넘도록 전세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여행객들은 한파와 폭설을 뚫고 여행가방을 끌며 4㎞가량을 걸어가야 했다. 제설 작업이 이뤄지지 않은 거리는 꽁꽁 얼어붙었다. 시내버스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30분이나 걸려 가야 했다.
◆재난대응 매뉴얼 없는 제주도
제주공항 결항 사태에서 ‘한국관광의 메카’로 손꼽히는 제주도의 재난 대응 매뉴얼은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설, 교통, 숙박, 구호물품 등 무엇 하나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 제주도의 제설장비는 대부분 산간 지방에 배치돼 손도 쓰지 못했다. 공항에 발이 묶인 여행객들이 일시에 제주시와 그 주변으로 몰리면서 ‘숙박 대란’이 이어졌다.
23일 밤 제주공항에서 노숙한 1000여명은 담요와 깔개, 생수 등 긴급 구호물품을 지원받지 못해 1만원짜리 수하물 박스 위에서 난민처럼 쪽잠을 자야 했다. 제주도 차원의 태풍 대응 매뉴얼이 있었지만 최대 수용인원이 500명에 불과했다. 항공 운항이 마비된 사흘간 총 8만명 이상의 발이 묶이자 제주도는 속수무책이었다.
결항 사태의 피해는 특히 외국인 관광객에게 컸다. 공항에 배치된 외국어 통역요원은 12명에 불과했고, 외국어 안내방송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국어를 모르는 개별자유여행객들은 숙소를 구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공항 바닥에서 종이박스를 깔고 밤을 새워야 했다. 중국인 단체관광객 40명가량을 인솔한 가이드 황모씨(35)는 “제주 시내 숙소를 구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찜질방에서 2박을 해 손님들의 원성을 샀다”며 “사물함이 꽉 차 찜질방에도 들어오지 못한 팀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제주도는 부랴부랴 한라체육관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언제 항공 운항이 재개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공항을 떠날 수 없는 데다 ‘난민수용소’ 같은 체육관으로 가려고 하는 여행객은 극히 드물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첫날 밤새 교육원, 연수원, 민박 등 모든 숙소를 수배했는데 교통 및 공신력 문제 등에다 안전, 난방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며 “몇 시간 내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말해 초동대응 실패를 인정했다.
◆제주도-공항공사의 ‘난방비’ 논쟁
제주도와 한국공항공사는 한술 더 떠 ‘난방비’ 논쟁을 벌이다 빈축을 샀다. 한국공항공사 제주지역본부는 “노숙을 하고 있는 체류객을 위해 공항터미널에 밤새 난방을 해달라”는 제주도의 요청에 “난방비는 누가 부담하느냐. 노숙 중인 체류객을 한라체육관 등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제주도가 체류객을 위해 깔판용 스티로폼 등을 지원하겠다고 하자 “안전사고가 나면 누가 책임을 지고, 청소는 누가 하느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원성을 샀다.
관(官) 차원의 초동대응이 실패한 가운데 민간 구호의 손길이 빛났다. 안타까운 상황을 보다 못한 도민들이 나서서 공항 체류객들을 돕기 시작한 것. 제주 최대 커뮤니티 사이트인 ‘제주맘카페’에는 “방을 내주겠다” “외국인도 환영한다”는 글이 줄을 이었다. 자원봉사단체와 기업들의 지원도 이어졌다. GS리테일, 동아제약, NH농협 등은 식사와 간식, SK텔레콤은 충전 서비스, 호텔신라의 비즈니스호텔 신라스테이는 무료 연박 서비스를 제공했다.
원 지사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제주도의 모든 위기대응 시스템이 관광객 수백만명 시대에 짜인 것인데, 지금은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연간 1400만명에 육박한다”며 “이번 기회에 교통, 숙박 연결, 항공권 대기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고재연 기자/김명상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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