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파독 50주년] "돈 벌러 독일 갔지만 가족 늘 그리워…편지 오는 날엔 모두 눈물바다"

입력 2016-01-29 19:02   수정 2016-01-30 15:13

일자리 찾던 나라에서 일자리 주는 나라로

독일로 간 한국의 딸들
1974년, 여섯살 딸 남기고 가…우는 딸 달래느라 가슴 미어져
남편이 보낸 사진 보며 또 눈물

고향 생각에 몰래 담근 김치…독일 사람들 "이상한 냄새 난다"
새벽에 멀리 갖다 버리기도

독일어보다 송금 방법부터 배워…빵 살 돈만 남기고 고국에 보내

한국 간호사들 현지서 인정…대학병원 등서 "와달라' 요청
개인에겐 새로운 기회 안겨줘



[ 박상용 기자 ]
1975년 2월, 독일 북서부 오스나브뤼크시에 있는 육군통합병원 간호사 기숙사. 한국인 간호사 다섯 명이 한 방에 모여 울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던 가족의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간호사 중에는 1974년 1월 여섯 살 딸과 아홉 살 아들을 남겨두고 독일로 떠나온 노금희 씨도 있었다. 노씨(77)는 29일 기자와 만나 “파독을 앞두고 3개월간 교육받는 동안에도 ‘독일에 가야 하느냐’며 우는 딸 때문에 가슴이 미어졌다”며 “한 달에 한 번 기다리던 편지가 오는 날이면 한국인 간호사끼리 모여 같이 읽으며 울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에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1만14명. 대부분 “돈을 벌 고 싶어 이역만리로 떠났다”고 했다. 늘 떠오르는 건 고향 풍경과 가족 얼굴이었다. 독일어보다 송금 방법을 먼저 배운 파독 간호사들은 빵 살 돈만 남기고 번 돈을 부모형제를 위해 고국으로 보냈다.

파독 간호사들은 당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컸다고 입을 모았다. 담담하게 회상하다가도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 10개월 된 딸을 두고 1966년 10월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던 황보수자 씨(74)는 “독일에는 전화기가 많았지만 한국에는 마을에 한 대 있을까말까 해 편지 말고는 소식을 주고받을 방법이 없었다”며 “남편 편지와 함께 온 딸 사진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작은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72년 파독됐다 지금은 경남 남해 독일마을 기념관 해설사로 있는 권광순 씨(66)는 “동료들과 몰래 김치를 담가 병원 옥상에 숨겨놨는데 독일 사람들이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며 “새벽에 김치를 멀리 가져다 버리고 돌아온 적이 있다”고 당시를 회고하며 웃었다.

청춘들에게 향수병은 견디기 어려웠다. 1973년 5월 독일로 간 민경임 씨(66)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하거나 정신이상을 일으키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고 했다.


파독을 앞둔 교육 기간에는 독일어보다 반공과 송금 교육이 우선이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 중이던 당시 대한민국은 외화에 목말라 있었다. 민씨는 “의사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독일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며 “독일어 포켓사전을 들고 틈틈이 공부해 6개월이 지나서는 업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권씨도 “초기에 가장 겁났던 일이 전화 응대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은 절반 이상 한국으로 부쳤다. 황보씨는 “대구에서 과수원을 하며 유복하던 집이 6·25전쟁 이후에는 비료도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해졌다”며 “봉급의 절반을 부쳤는데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고 말했다.


파독은 가난했던 조국뿐 아니라 간호사 개인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줬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황보씨는 한국에 돌아와 이화여대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하며 연세대에서 간호학 박사학위까지 땄다. 이후 인제대에서 교수로 일했다.

노씨는 귀국해 간호사로 일하다 독일 대학병원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1992년 다시 독일로 갔다가 2005년 귀국했다. 민씨도 1978년부터 30년간 고양시청 보건소에서 일했다. 권씨는 자신을 기다려준 약혼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광부로 독일에 가겠다는 말에 독일 병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급히 귀국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 파독 간호사 노금희 씨

빵 살 돈만 남기고 월급을 모두 집에 보냈다. 천 쪼가리를 기워 옷을 지어 입었다. 그래도 우린 열심히 일했고 독일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인정받는 ‘한국의 천사들’이었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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