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상 기자 ] 흐르는 시간 앞에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절이 사라진 자리인 폐사지(廢寺址)는 그 진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폐사지는 무심하다. 진리를 추구하고 자비를 설하던 이들은 이제 없다. 도력이 높은 국사(國師)가 머물렀던 과거의 위엄은 간데없다.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꽃이 지듯 모든 영화가 사라지고 적막함만이 깃든 폐사지에 서면 마음속 희로애락이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고즈넉한 정취 가득한 강원 원주 거돈사지
유홍준 교수는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폐사지 답사가 ‘절집 답사의 고급 과정’으로 ‘답사객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이라고 했다. 강원 원주 남한강 인근에는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 등 신라시대에 창건됐다가 임진왜란 때 사라진 폐사지가 여럿이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탑과 탑비 등이 남아 옛 사찰의 규모와 고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전한다.
그중 폐사지의 고즈넉한 정취를 가득 담은 곳은 거돈사지다. 발굴과 복원이 끝나서 말끔하게 정돈된 폐사지이기 때문에 여행자에게 안성맞춤이다. 수령 1000년이 넘는다는 ‘돌을 먹고 사는’ 느티나무도 볼 만하다.
거돈사지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 높이만큼 제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삼층석탑의 상단이 보이고, 금당 터가 차츰 빗장을 연다. 마치 지상에서 천상으로 걸음을 옮기는 듯하다. 사라진 절터를 걷는 일은 사유의 여행임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원주시 관광안내소 (033)733-1330
마의태자 전설 깃든 충북 충주 미륵대원지
신라시대 마의태자의 이야기가 얽힌 충북 충주의 ‘미륵대원지’는 계단식 구조다.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완만해서 평지처럼 느껴진다. 한 칸 오르면 당간지주가 누워 있고, 또 한 칸 오르면 거대한 돌 거북(귀부)이 버티고 있다. 두어 칸 위에 오층석탑이 우뚝하며, 일직선으로 석등과 석불이 자리한다.
절터의 석불은 높이가 10.6m에 이른다. 커다란 돌덩이 네 개로 몸을 만들고, 갓과 좌대는 다른 돌을 썼다. 미륵대원지에는 마의태자와 얽힌 애잔한 전설이 있다.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공주는 나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떠났다. 도중에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게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 석굴을 지어 북쪽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이야기다.
절터를 구경한 뒤 하늘재에 오르면 백두대간 산봉우리가 물결치는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충주시청 관광과 (043)850-6723
영혼과의 러브스토리 담은 전북 남원 만복사지
춘향과 판소리로 유명한 전북 남원에는 고려 문종 때 창건한 만복사가 있다.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지다. 노총각 양생이 만복사에서 만난 여인의 영혼과 사랑을 나누고 부부의 연을 맺은 이야기는 춘향전에 버금가는 러브스토리다.
만복사는 한때 수백명의 승려가 머물렀을 정도로 번성했으나,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소실됐다. 전각은 모두 불타고 지금은 오층석탑(보물 제30호), 석조대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3호), 석인상, 주춧돌 등만 남았다.
만복사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석인상이다. 키 3.7m에 다부진 체격, 꽉 다문 입술이 특징인 석인상은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당(깃발)을 멘 장대를 지탱하던 당간지주다. 만복사지 옆 도로변에 머리 부분이 노출된 채 땅에 묻힌 것을 2009년 절터 안으로 옮겼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스산한 폐사지의 풍경이 상반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남원시청 문화관광과 (063)620-6161
쌍사자가 눈을 부릅뜬 경남 합천 영암사지
경남 합천 황매산 자락의 모산재 기암절벽 아래에 영암사지가 있다. 절집의 내력은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다. 절터는 기암절벽과 잘 어우러지고, 쌍사자 석등이 이곳을 대표한다.
영암사지에서는 금당 터와 서금당 터, 중문 터, 회랑 터 등이 발견됐다. 회랑 터는 경주 불국사나 황룡사지, 익산 미륵사지처럼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집이었음을 알려주는 단서로 꼽힌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사자 두 마리가 마주 보며 화사석을 받치는 형상이다. 사자상 위아래로 아름다운 연꽃이 조각됐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금당 터의 석축은 특이하다. ‘ㅜ’형으로 가운데가 튀어나오게 석축을 쌓았고, 이 부분에 쌍사자 석등이 앉아 있다. 석축 위에 금당 기단을 쌓고 목재로 건물을 지었겠지만, 지금은 돌로 만든 기단과 주춧돌이 남았을 뿐이다. 기단에 다양한 문양을 새겼는데, 금당을 돌아보며 하나씩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합천군청 관광진흥과 (055)930-4666
김명상 기자 terr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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