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공부] 일본에 진 청나라, 독립국 조선 인정…대한제국 출범, 13년만에 패망 '단명'

입력 2016-03-07 07:00  

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9)



조선의 군주 고종이 황제가 돼야 한다는 주장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날 무렵부터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조선은 청나라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중국의 그늘에 있었던 관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조선이 황제의 나라라고 선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이 청나라와 아무 관계도 없는 독립국이라고 못을 박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황제국 ‘대한’

시모노세키조약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인 1895년 4월17일 맺어졌습니다. 이 조약의 제1조에는 “조선국이 완전한 독립자주국임을 승인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에 이긴 일본은 왜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라고 청나라에 요구했을까요? 그 이유는 조선이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자신들이 조선을 쉽게 침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조약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羚享윱求?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2월20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경복궁을 벗어난 지 꼭 1년 만이었습니다. 같은 해 8월 고종은 조선을 황제의 나라로 새로 세우고 자신이 황제가 됐음을 발표했습니다. 새 황제의 연호는 광무(光武)로 정했습니다. 연호는 황제가 즉위한 해를 1년으로 삼아 날짜를 세는 칭호지요. 고종 이전의 조선에서는 주로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일본 주도로 이뤄진 을미개혁 때 처음 조선의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습니다. 1896년 1월1일을 시작으로 하는 건양(建陽)이라는 연호였습니다. 그러나 건양은 일본의 압력으로 제정된 연호였으니 새로운 제국을 선포하면서는 새 연호가 필요했습니다.

1897년 10월 초 고종이 ‘광무황제’가 됐음을 하늘에 고하기 위해 서울 회현방(중구 소공동)에 환구단을 세웠습니다. 즉위식 다음날 고종황제는 새 나라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신하들과 논의했지요. 고종황제는 “우리나라는 원래 삼한(三韓:마한 진한 변한)의 땅인데, 나라 초기에 하늘의 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됐다. 그러니 지금 국호를 큰 한, 즉 ‘대한(大韓)’이라고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제의했습니다. 신하들이 이에 동의해 우리 역사상 최초의 황제국 이름이 ‘대한’으로 정해졌습니다.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

황제의 나라를 세우는 것에 모든 사람이 찬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윤치호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신지식이었지만 황제 즉위를 비판했지요. 나라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힘인데 외국 군대가 왕궁에 쳐들어와 짓밟고 왕비를 시해하는 마당에 황제 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주장이었습니다. 최익현 같은 유생들도 망령되게 스스로를 높이는 행위라며 황제 즉위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는 많은 지식인의 주장에 힘입어 대한제국은 선포됐고 그 소식은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습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앞서서 대한제국 선포를 축하하며 승인해주었습니다. 이어 일본,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가 대한제국을 승인했습니다.

황제가 됐다고 고종이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898년 7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안경수가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모의를 하다가 발각됐습니다. 또 고종을 독살하려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김홍륙이라는 사람이 궁중 사람들을 돈으로 사서 황제와 황태자가 마실 커피에 많은 양의 아편을 섞은 것입니다.

‘구본신참’으로 광무개혁

이렇게 황제가 위기도 겪었지만 대한제국은 여러 가지 개혁을 펼쳐나갔습니다. 이를 광무개혁이라고 하지요. 광무개혁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구식을 근본으로 삼고 신식을 참고한다는 이념 아래 전개됐습니다. 우선 자주독립을 지키고 근대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군사력을 증강했고 외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간도 지방으로 이주한 동포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를 보냈고 북간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하고자 시도했습니다. 또 1900년에는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라는 기사를 관보에 싣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 대한제국은 토지 측량 사업과 상공업 진흥 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선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채 맺지도 못한 채 대한제국은 개국 13년 만인 1910년에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대한제국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하지만 ‘대한’이라는 나라 이름, 태극을 담은 국기 등 국가의 주요 상징이 일제강점기를 넘어 오늘의 우리나라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을 기억할 때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대한제국은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넘보는 위기 상황에서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이뤄진 나라라는 점입니다.

글=황인희/사진=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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