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형 대학'에 미래 있다
정부 주도 산학연계 활발…베이징대·칭화대 기술지주사 설립
민간자본 허용하며 빠르게 성장
창업 선순환 구조 이끌어…대학기업이 청년창업 발굴해
'중국 실리콘밸리' 중관춘서 보육…M&A 통해 대학기업으로 흡수
무관심에 우는 한국 대학 …자본금 부족에 사업화 지지부진
대학의 기업활동 인식부터 바꿔야
[ 오형주 기자 ] 중국 베이징대와 칭화대 대학기업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서울대 교수들은 중국 대학기업이 자산·매출 수조원대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대로는 재정적 측면에서 도저히 쫓아갈 수 없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며 “한국 대학들이 정부 통제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율적인 발전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획기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부터 대학기업 키운 중국
보고서는 중국 대학들이 기업을 키워 재정을 충당하고 산학협력을 강화하는 점에 주목했다. 중국 교육부의 2013년 통계에 따르면 중국에선 552개 대학이 5279개 기업을 운영 중이다. 대학기업의 연간 총 매출은 2081억위안(약 37조4000억원), 순이익은 83억위안(약 1조5000억원)에 달했다.
대학기업이 대학에 가져다주는 재정적 기여 역시 엄청났다. 대학기업의 순이익 중 지분에 따라 대학이 거둬들이는 돈이 베이징대는 연간 4억4000만위안(약 791억원), 칭화대는 8억4000만위안(약 1510억원)가량이었다.
중국 대학기업의 역사는 대학이 학교에서 운영하는 공장 등 자체 사업장을 보유하기 시작한 195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부터는 정부가 ‘과학기술형 대학기업 진흥정책’을 세우고 대학기업을 적극 육성하기 시작했다. 1992년 중국 국가과학위원회는 “대학의 과학기술력을 생산력으로 실현할 것”을 주문했다. 2001년에는 대학기업에 현대적 기업제도를 갖춘 ‘자산경영공사’를 신설하도록 하고 민간자본 유치를 허용하는 등 소유권 개혁을 단행했다.
베이징대는 의료, 칭화대는 IT 집중
베이징대는 왕쉬안 교수가 개발한 한자 컴퓨터 시스템 기술을 토대로 1986년 베이다팡정(北大方正)을 설립했다. 베이다팡정은 2004년 베이다팡정그룹유한공사(지주회사)로 개편됐다. 2000년대부터 민간자본 유입이 본격화돼 2015년에는 베이다팡정 계열사에 대한 대학의 지분율이 14%에 불과할 정도로 자본의 민영화가 진척됐다. 정보기술(IT), 금융, 부동산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계열사를 거느린 베이다팡정은 최근엔 베이징대 의과대학의 강점을 살려 의료를 중심으로 한 발전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2014년 개원한 병상 2000개 규모 베이징대국제병원이 대표적이다. 아시아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춘 이 병원 건립에는 45억위안(약 8100억원)이 투입됐는데, 베이다팡정이 70%, 베이징대가 30%를 투자했다.
칭화대는 베이징대보다 앞선 1980년 중국 첫 대학기업인 칭화기술서비스회사를 세웠다. 1997년에는 둥팡주식유한공사를 증권거래소에 상장시켰고, 2003년에는 지주회사인 칭화홀딩스를 설립했다. 최근 미국 마이크론 인수를 시도해 세계 반도체업계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칭화유니그룹(淸華紫光集團)도 칭화홀딩스 소속이다. 의료를 성장동력으로 삼은 베이징대와는 달리 반도체 등 IT에 치중하고 있는 점이 칭화대의 특징이다.
서울대 교수들은 베이징대와 칭화대의 대학기업들이 중국 최대 IT 클러스터인 베이징 중관춘(中關村)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중관춘은 베이다팡정, 칭화홀딩스 등 대학기업의 본사는 물론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기업, 각종 연구소 등이 입주해 뛰어난 산학연 네트워크를 갖췄다. 이곳에 입주한 1만6000여개 기업에 고용된 인원은 약 200만명에 달한다. 두 대학의 대학기업들은 중관춘에 국가급 과학기술단지인 베이다과학기술원과 칭화과학기술원을 설립해 동문 벤처 보육과 투자 등을 맡았다. 이강재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대학기업이 창업활동을 지원하면 그 결과물은 지분 매각과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다시 대학기업으로 흡수되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돼 있다”고 설명했다.
“대학 기업활동 공감대 키워야”
서울대는 2008년 대학 보유 기술을 출자해 자회사를 세울 수 있는 기술지주회사 제도가 허용됨에 따라 ‘서울대기술지주회사’를 설립, 대학기업 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14년 기준으로 26개 자회사가 올린 총 매출은 154억원이었다. 투자에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이 적은 데다 기술 사업화나 창업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탓이다. 그나마 이뤄지는 사업화와 창업도 기술지주회사를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보고서는 우선 현재 140억원 정도에 불과한 기술지주회사의 자본금을 더 늘릴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또 보고서는 학교 내에 지식 및 기술자원의 사업화와 창업활동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한 만큼 “기존에 추구해온 ‘교육형 대학’과 ‘연구형 대학’에 ‘기업가형 대학’의 정체성이 새롭게 더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베이징대 등에 비해 서울대의 여유공간이 부족한 데다 인근에 중관춘처럼 과학기술단지 조성이 쉽지 않은 점도 제약 조건으로 꼽혔다. 보고서는 “바이오산업은 시흥캠퍼스에 서울대병원 등과 연계한 연구단지를 조성하고 평창캠퍼스에 생산기지를 형성해 산학협력 등 시너지 효과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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