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숨은 경제 이야기] 우리 역사에서 물물교환은 20세기까지

입력 2016-03-28 07:00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


인류가 창안해 낸 경제적 발명품 중에서 우리의 삶을 가장 편리하게 해 준 것은 단연 화폐일 것이다.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사거나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려 할 때 지불 수단인 화폐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떠올려 보면 화폐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용성이 얼마나 큰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화폐라는 개념을 창안하기 이전에는 물물교환을 통해 주로 거래를 수행했다. 물물교환이란 돈으로 매매하지 않고 직접 물건과 물건을 바꾸는 거래 행태를 말한다. 이러한 물물교환은 가장 원시적인 거래방식이다. 생수 한 병을 사기 위해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서는 편의점 아저씨에게 대가로 다른 물건을 주거나 편의점에서 1~2시간이라도 일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때도 택시기사가 필요로 하는 물건 등을 주어야지만 택시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시들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듯이, 물물교환을 통해 거래를 수행할 경우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 이유는 거래 당사자 모두의 욕구를 일치(double coincidence of wants)시키기?어렵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물물교환을 위해서는 거래 상대방 모두 상대방이 원하는 물건을 보유해야 거래가 성사되는데 이러한 물건을 쌍방이 모두 보유하고 있고 그리고 이들이 거래가 필요한 시점에 서로 마주칠 가능성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가 화폐를 고안해 거래에 활용하기 시작한 가장 궁극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물물교환에 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역사에서 물물교환은 20세기까지 가장 대표적인 거래 행태 중 하나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동네에서 아는 지인 간의 거래가 아니라 국가 간의 무역거래에서 물물거래가 주로 사용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독립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국내 산업 시스템이 일순간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 보직에는 조선인을 기용하지 않고, 일본인들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1940년대 해방 이전까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조업 자본의 90% 이상이 일본 자본이었으며, 제조업 분야 전문 기술자 역시 80% 이상이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일본인이 일시에 모두 사라진 시점에는 다양한 생활용품 등을 적시에 공급받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은 남한은 농업 중심으로 북한은 공업 중심으로 구분된 산업구조로 진화시켜 왔는데, 해방과 함께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북한으로부터 전력, 비료, 지하자원 등의 교역이 어렵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중요 생필품의 가격이 폭등했고, 전반적인 물가 역시 급격히 상승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주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칭다오, 다롄 등 중국 연해 지역 도시의 중국 상인들이었다. 중국에 있는 일본인들 역시 세계대전 패망으로 인해 공장뿐만 아니라 자재 및 재고 등을 그대도 두고 급히 본국으로 귀국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인 공장에는 많은 군수품, 공산품, 생필품 등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중국 상인들은 바로 일본인 공장에 남겨진 각종 생필품과 공산품을 활용한 것이다.

당시 해안 지역 도시의 중국 상인들은 이들 물건을 한반도에 가져가 팔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흔히 정크선(Junk)이라 불리는 무동력선에 물건을 싣고 와서 한국과 교역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중국과 전개된 무역을 속칭 정크무역이라 부르게 되었다. 국내 상인들 역시 이들 중국 상인과 거래할 유인은 충분했다. 당시 무역은 주로 인천항에서 전개되었는데 인천에서 중국 상인들로부터 이들 물건을 구매하여 되팔아 손쉽게 10배 가까운 이득을 취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정크무역 수행 과정에서의 대금 결제가 현금이 아닌 현물로 이뤄졌다. 다시 말해 물물거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중국 상인들이 주로 싣고 오는 물품은 농산물, 생필품, 공산품 등이었다. 이들 물건을 구매한 한국 상인들의 대금 결제 수단은 주로 오징어와 새우 미역과 같은 해산물, 광석과 같은 지하자원이었다. 해방 이후 불안정한 국내 통화로 대금을 결제하려 해도 중국 상인들이 이를 거절했으며, 달러와 같은 외화는 더더욱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과의 무역을 통해 중국 상인들이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 주변국 상인들에게도 알려지면서, 한국과의 교역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곳은 다름 아닌 마카오와 홍콩이다. 포르투갈령인 마카오는 한국과의 무역을 적극 승인해 줌으로써 양국 간의 교역은 급격히 증가했다. 당시 두 지역 간의 교역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사실은 교역에 이용된 선박의 규모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1947년 3월에 처음으로 인천항에 입항한 마카오 무역선 페어리드 호는 2000t급 선박이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무동력선을 바탕으로 한 중국 상인과의 무역 규모와는 쉽게 대비된다 할 것이다.

홍콩 역시 마카오가 한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커다란 이익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연이어 한국과의 교역에 뛰어들게 된다. 한국 상인들 역시 해외 무역을 통해서 커다란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홍콩과의 무역은 우리 상인들이 주도해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당시 홍콩과 마카오와의 교역 역시 대금 결제는 현물이었다. 마카오와 홍콩에서는 생고무, 제지, 생필품을 비롯한 다양한 잡화를 국내로 수출하고, 대금으로는 중석 아연과 같은 지하자원 그리고 오징어 새우 해삼과 같은 해산물을 역시 가져가는 형태로 무역이 전개되었다.

물물교환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원시적인 거래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는 물물교환이라는 거래 형태가 20세기까지 고스란히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인 듯하다.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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