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와 ‘삶의 목표는 행복 추구다’는 완전히 다르다. 일부러 불행을 추구하는 이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삶의 목표라든가 인간 존재의 이유가 행복 추구라고 하면 비약을 넘어 심각한 오류다. 인생의 목표가 더 많은 행복이라는 이도 있겠지만 삶의 지향점이 행복 추구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이도 많다. 쇼펜하우어식 염세주의자도 있고, 그냥 ‘던져진 존재(게보르펜하이트)’라는 실존철학적 관점도 있다. 도쿠가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고단한 길로 보는 이들도 상당할 것이다. 행복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면 쾌락지상주의자나 마약쟁이도 되겠지만, 어느 쪽이든 좋다.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문제는 국가가 나서 행복을 개인 삶의 목표인 양 설정하는 것이다. ‘네 삶이 행복해지도록 다 해주겠다’는 극단적인 체제가 공산국가다. 물론 국가가 강요하는 행복, 가짜 행복이다. 간섭과 통제의 다른 이름이다. 행복은 그런 추구를 하지 않는다는 자유까지 포함해 본질적 자유권에 속한다. 복지 국가론도 이 점을 놓친다. 개인의 행복을 국가가 규정하고, 확보해 주겠다는 의욕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요약되는 공리주의 철학에서 겉만 따온 가장된 포퓰리즘이다.
행복 추구는 개인의 '자유권'
국가가 제공하겠다는 관급 행복에는 끝도 없다. 재원이 유한하니 자칫 불만만 키울 것이다. 평등해질수록 작은 불평등을 더 못 참는, 그런 본성만 자극하게 된다. 결국 시민의 자립의지를 좀먹고, 의타심만 키운다.
박근혜 정부조차 관제 행복의 틀에 갇혀 있다. 행복주택, 국민행복기금, 국민행복제안센터에 이어 이번엔 행복센터(행정복지센터)다. 2018년 말까지 전국 3500여개 주민센터를 행복센터라고 개칭 작업을 하겠다고 한다. 가뜩이나 범람하는 복지체계로 기대치는 폭발할 텐데 어떻게 맞출까. “도대체 행복하지가 않다”는 국가 원망이 사방에 넘칠 것이다. “정부는 내 행복 책임져라!”는 하소연을 누가 감당하나. 관제 행복은 전부 돈이 든다. 만족시킬 수 없는 구조다. 국민을 ‘투덜이’ 불평꾼으로 전락시키는 행복 제공 경쟁은 선거 때마다 격화되게 돼 있다.
주민센터를 행복센터라고?
정명(正名) 차원에서 보면 행복만도 아니다. ‘녹색교통’이란 교통행정도 있다. 행정적 책임이 없는 시민단체 구호라면 상관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세금이 투입되고, 법적 책임이 수반되는 정책이라면 이름부터 명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현재의 기술로는 교통체증이나 대기오염은 불가피할 텐데 ‘나의 녹색권’ 같은 것을 보상하라고 떼라도 쓰면 어쩔 텐가. 유해가스 저감계획, 주행속도 올리기 정책이라는 게 적절하다. 이명박 정부 때 ‘녹색성장’이란 휘황한 구호로 추가된 산업계의 비 釉맨巒?계산조차 어렵다.
‘행복주택’보다는 신혼부부 임대주택계획, 저소득 독신가구 주거대책으로 ‘팩트’를 담아야 한다. 그래야 선별적 복지의 실체도 분명해진다. 정부가 왜 개인의 인생철학에 개입해 원망을 듣나. 본질적 자유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근본 문제다. 그렇게 의타심만 높여 놓으면 관급 행복의 배분과정, 즉 복지전달체계에서 본대로 거짓말쟁이 국민까지 양산하게 된다. 기초연금이 도입된 과정에서 재산을 속이고, 자녀에게 빼돌리며, 돈 달라고 생떼 쓴 노인이 너무도 많았다. 국가가 무차별적으로 행복을 주겠다며 나선 결과였다. 철학 없는 감성정치가 국민을 나약하게 만들고 있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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